책이름 : 여행, 혹은 여행처럼
지은이 : 정혜윤
펴낸곳 : 난다
그녀는 나에게 책 칼럼니스트로 먼저 다가왔다. 책갈피에서 자주 그녀의 이름이 언급되거나 글이 인용되었다. 그리고 세월호 재난 가족들과 함께 한 팟캐스트,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 그녀의 시선은 재난공화국 대한민국의 사회적 약자들로 향하고 있었다. 송구스러웠다. 자칭 활자중독자가 그녀의 책을 단 한 권도 손에 잡아보지 못했다니.
박웅현의 『여덟 단어』였을 것이다. 뒤늦게 자신의 길을 찾은 지도제작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여행, 혹은 여행처럼』에서 읽었다고 한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군립도서관 검색창에 ‘정혜윤’을 때렸다. 나도 모르게 환하게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두 손가락으로 꼽기에 모자른 책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우선 교통이 가장 불편한 면소재지 도서관의 책 두 권을 빌려왔다.
정혜윤은 CBS 라디오 PD였다. 책은 여행에 대한 에세이였고, 여행을 주제로 한 인터뷰 집이었다. 부제가 '인생이 여행에서 배워야 할 것들'이었다. 책은 본문 14개의 챕터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까지 16편의 글로 이루어졌다. 글의 말미마다 인용된 글이 실린 책과 인터뷰한 사람들의 짧은 이력이 실렸다. Prologue 「왜 인생을 여행이라 하는가」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파리의 페르 라 셰즈 묘지의 오스카 와일드 무덤에 해바라기 한 송이를 바치기 위해 특별한 여행을 떠나 온 한국계 입양아로 보이는 부인과 남편.
생명력 처녀(엄마)와 늙다리 총각(아빠)의 결혼 그리고 딸(저자), 포르투갈 리스본 근처 해안의 등판에 모래가 달라붙은 소년들의 축구. 최초로 살던 집 1층 양옥은 대문에서 현관까지 도열한 포도나무와 쐐기벌레, 둔황에서 우루무치로 가는 실크로드 여행에서 투루판은 가로수가 포도나무. 매년 포도주를 담글 때 함지박의 소주와 설탕을 함께 넣은 포도를 발로 으깨었던 어린 저자, 서울로 대학 간 오빠가 방학 때 고향을 찾았을 때 가져 온 몇 권의 책 중 하나 『전태일 평전』. 경북 의성 귀농부부를 취재하면서 들려 온 소의 구슬픈 울음소리, 우울한 날 듣는 방송 가위로 잘려나간 불필요한 소리를 이어붙인 릴테이프. 고깃국을 피하는 손녀에게 가족 몰래 속고쟁이 동전을 쥐어주던 할머니, 비행기가 이륙하자 술과 담배가 무한정 제공되는 속세의 즐거움을 마음껏 즐기는 이슬람교도.
충북 음성 금왕 노인복지관 시창작 교실 수업의 정반헌․한충자․이명재 할머니는 일흔 살이 넘어 한글을 깨치고 시창작반에 들어와 동아리 시집을 펴냈다. 기자의 시선이 아닌 인간 임종진의 시선으로 캄보디아 가난한 사람들(철거민)의 사진을 찍은 전 한겨레신문 기자 임종진. 강제추방 저지․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를 위한 투쟁을 벌이는 한국 이주노동자 16년 경력의 민주화 활동가 미얀마 출신 소보뚜. 나무를 세며 나무의 이력을 배우면서 내면의 혁명적 눈뜸에 이른 나무인간 강판권. 자신이 잡아서 학계에 보고한 진딧물만 20여종의 진딧물 박사 김효중. 길고 강한 싸움은 깊은 사랑의 다른 표현의 노동자 시인 송경동. 586세대 운동권으로 뒤늦게 지리정보 시스템(GIS) 수업을 듣고 자기 적성을 발견한 지도제작자 송규봉. 가장 오래된 언어 라틴어로 된 책을 찾아 세계를 떠도는 인문학자 안재원.
인도양 몰리브 바다에 비치는 별빛을 등에 받는 검푸른 물속의 물고기들, 야간 조명이 꺼진 몽생미셸수도원 밤하늘에 나타났던 은하수. Epilogue 「너 또한 하나의 여행지니」는 해발 3820미터의 라틴 아메리카의 티티카카 호수,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해변, 노르웨이의 난류와 한류가 부딪히는 소리, 갈라파고스 제도의 바다 이구아나, 콜럼버스가 상륙한 해안 등. 저자 정혜윤은 말한다. “매번 여행이 끝날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다른 영혼이 되어 돌아오기를 꿈꾼다.”(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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