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대빈창 2007. 12. 10. 14:18

 

책이름 :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지은이 : 강제윤

펴낸곳 : 조화로운 삶

 

느낌을 몇 자 적으려고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봐도 마땅한 글머리를 잡기 어렵다. 하긴 기행문이라는 장르가 필자의 사물과 형상, 여행에 대한 느낌과 사유를 긁적인 것이 아닌가. 시인의 글은 무겁다. 하긴 티베트 여행기로서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가 가볍다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티베트의 영도자 달라이 라마는 인도에 망명 중이다. 몇년 전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석연히 않은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던, 전 정권의 행태에 비판의 날을 세우던 소위 진보(?)주의자들은 이 책이 반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현 14대 달라이 라마는 중국의 침공으로 10만여 명의 티베트 민중이 흘린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여름궁전 노블링카를 지었다. 그런데 티베트의 사원을 파괴하고 종교를 억압하던 중국이 사원을 복구하고, 종교를 허용했다. 왜일까. 간단히 말해서 돈맛을 안 것이다. 더군다나 권력에는 전혀 위협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세속적이고 권력지향적인 종교는 자기보다 더 큰 힘과 이권 앞에서는 쉽게 굴복한다. 멀리 볼 필요도 없다. 이 땅의 종교들을 한번 들여다보라. 욕먹을 소리 한마디. 나는 언젠가 술자리에서 이렇게 내뱉었다. '한국의 대부분의 종교는 보수적이다. 그들의 행태는 믿음을 파는 자본이다. 또한 천박한 거물주의자들의 선민, 특권의식을 심어주는 학교'라고.

시인 강제윤과의 묵은 인연을 털어 놓는다. 5년 전 초여름. 나는 땅끝마을에서 출발한 보길도행 카페리호에서 손전화를 넣었다. 덕유산 속에서 오미자 농사를 짓고있는 후배에게. 그가 말했다. 이왕이면 민박을 '동천다려'로 정하라고. 길을 물어 찾으니, 고산의 대표적 유적인 세연정 못미쳐 돌집 민박의 상호가 '동천다려'였다. 필히 고산의 또다른 유적인 '동천석실'에서 이름을 빌려왔을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시인과 술자리를 같이했다. 그리고 시인과 후배의 인연을 알 수 있었다. 간난하기 그지없던 80년대를 정면돌파한 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관계였다. 다음날 아침 술이 덜깬 숙취상태에서 나는 버릇대로 방안의 책들을 일별했다. 시인의 에세이 두권과 유용주 시인의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가 앉은뱅이 책상에 놓여 있었다. 시인은 고향 보길도에 내려와서도 편히 쉴수가 없었다. 악머구리 같은 자본은 남해의 이 작은 섬에도 마수를 뻗쳤다. 보길도의 자연하천인 부황천을 시멘트화하려는 전남의 개발 계획에 맞서 시인은 단식농성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3년 걸려 손수 돌을 쌓아 민박집을 완성했다. 시간은 흘러 올 늦여름. 나는 볼음도에 출장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아차도에서 어딘가 낮익은 사람이 승선하는 것이 아닌가. 다 알다시피 서도는 유인도가 4개라 주민들을 손바닥 안의 금처럼 쉽게 알수 있다. 분명 키가 크고 잘생긴 보길도 시인이었다. 다만 무성한 수염이 온통 얼굴을 덮고 있었다. 아무렴 시인이 보길도에서 이 먼 섬까지 왔을까. 다음날 주문도 유일의 식당을 찾아, 포구로 내려가니 시인이 점심을 들고 있었다.  나의 기억력이 옳았다. 5년 전의 보길도 시인 강제윤이었다. 1년 전부터 한국의 모든 섬 500여개를 걸어서 순례 중이란다. 그때 뇌리를 스치는 한줄기 섬광. 마침 내일은 행정선이 말도에 들어가는 날이었다.  순례여정을 챙겨 준 고마움을 전하며 시인은 지난해 여름의 티베트 기행이 책으로 출간된다며 나의 주소를 메모했다. 그리고 하루 더 묶었다 가라는 나의 부탁을 만류하고, 외포리행 오후 배에 올랐다. '순례여정 상 서검도와 미법도를 내일 중으로 꼭 밟아야만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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