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지은이 : 허수경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시인 허수경(許秀卿, 1964-2018)의 시집을 펼치면서 나는 송구스러웠다. 문학관련 서적을 펼칠 때마다 가장 눈에 뜨이는 시인이었다. 근래 집중적으로 잡았던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어느 책에서 시인을 또 만났다. 대여목록에 없던 시집을, 군립도서관에서 나도 모르게 빼어들었다. 2016년에 나온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는 여섯 번째 시집이었다. 5부에 나누어 62시편이 실렸다.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해설 「저 오래된 시간을 무엇이라 부를까」에서 말했다.
“‘진주 저물녘’의 시간으로부터 독일의 오래된 도시와 폐허의 유적지로 이어지는 시인 허수경의 장소들과 시간들(······) 오래된 시간의 영혼을 노래하는 허수경의 한국어가, 저 먼 곳에서 계속 태어나고 되돌아오고 있다는 것”(165쪽)
시인은 경남 진주 출생으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공부했다. 1986년 『실천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1987년 첫 시집을 상재했다. 두 권의 시집을 내고, 1992년 늦가을 독일로 떠났다. 대학원은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고대근동고고학을 전공했다. 2001년 독일에서 세 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를 출간했다. 시인은 독일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며 작품 활동을 지속했다. 표제는 「빙하기의 역」(111-113쪽)의 1연에서 따왔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얼어붙은 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시인은 2018년 독일에서 투병 중에 별세했다. 30년의 시력에서 25여년을 이국의 삶 속에서 모국어로 시를 써왔다. 시인은 “우리말의 유장한 리듬에 대한 탁월한 감각, 시간의 지층을 탐사하는 고고학적 상상력, 물기어린 마음이 빚은 비옥한 여성성의 언어로 우리 내면 깊숙한 곳의 허기와 슬픔을 노래‘한다고 평가받았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생명체가 살아가는 유일한 별 지구를 불덩어리로 만들었다. 묵시록적 디스토피아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마지막은 내가 그렇게 읽은 시편 「아사餓死」(80-81쪽)의 전문이다.
마지막 남은 것은 생후 4개월의 소였다 / 씨앗을 뿌리지 못한 밭은 미래의 지평선처럼 멀었고 / 지평선 뒤에 새로 시작되는 세계처럼 거짓이었다 / 아이는 겨우 소를 몰았다 / 소는 자꾸만 주저앉았다 / 아이의 얼굴이 태양 아래에서 검은 비닐처럼 구겨졌다 / 소의 다리가 태양 아래에서 삼각형으로 고꾸라졌다 / 인간의 눈은 태양신전이 점령한 전쟁터 임시병원이었고 / 짐승의 눈은 지옥신전에 갇힌 포로였다 / 아이는 두 팔로 소를 밀었다 / 소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 아이는 윗몸을 다 기대며 소를 밀었다 / 소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 아이도 주저앉아 소를 밀었다 / 소는 빛 속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 아이는 소를 제 품에 안았다 / 둘은 진흙으로 만든 좌상이 되어간다 / 빛의 섬이 되어간다 / 파리 떼가 몰려온다 / 파리의 날개들이 빛의 섬 위에서 / 은철빛 폭풍으로 좌상을 파먹는다 / 하얗게 남은 인간과 짐승의 뼈가 널린 황무지 / 자연을 잡아먹는 것은 자연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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