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근무일지

대빈창 2024. 1. 12. 07:30

 

책이름 : 근무일지

지은이 : 이용훈

펴낸곳 : 창비

 

시인 이영주는 표사에서 말했다. “언어는 삶을 온전히 받아안을 수 있는가.······. 이용훈의 시를 읽고 나서 나는 점점 더 깊은 구렁으로 빠져들었다. 이러한 삶 앞에서 시라니.” 일용직 건축공사장 인부, 건설 외장공사 노가다, 인력시장 운전기사, 아파트 택배기사, 수화물 터미널 화물 분류, 정신병원 폐쇄병동 보호사, 환경미화원, 코로나 자가격리자 쓰레기 수거, 식품 공장 오이 세척, 재개발 철거반, 가구공장 본드 접착, 맨홀 오물 청소 등.

천민자본주의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비정규직, 아니 파트타임 노동자들의 살풍경한 노동현장 모습이 시편마다 빼곡했다. 시인 이용훈李鎔勳은 2018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나왔다. 등단 4년 만에 펴낸 첫 시집은 노동 현장의 날것 그대로를 보여 주었다. 부 구분없이 57편의 시가 실렸다. 문학평론가 김수이는 해설 「‘해체되기 위한 쇼’에 초대당한 당신」에서 “버틸 수 없는 사람들, 소비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골라내 ‘인간 쓰레기’로 폐기하는 곳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124쪽)이라고 했다.

「잡역부」(47-48쪽)에 나오는 단어 ‘라성’의 각주는 - 라성호텔 라성식당 라성양꼬치 라성실비 라성게임장 라성통신 라성택배 라성슈퍼 라성복권방 라성당구장 라성노래방 라성 라성 라성, 라성은 안산이 아니다 원곡동은 더 이상 불야성이 아니다 - 였다. 여기서 나의 기억은 89-90년 겨울로 리와인드되었다. 그 시절 나는 안산공단 화공약품 공장노동자였다. 고잔동 빌라의 지하방에 혼자 살았다. 쉬는 날이면 원곡동 한 건물 지하의 안산노동자문학회 준비모임에 얼굴을 내밀었다. 허허벌판에 검은 아스팔트가 뱀처럼 구불거렸다. 새로 조성된 공단도시에 하나둘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버스가 서는 곳마다 한두 동의 고층건물 꼭대기 외눈박이 붉은 등이 깜박거렸다. 그렇다. 그 건물 중의 하나가 ‘라성프라자’였다.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는 서해의 작은 외딴섬에 몸을 의탁했고, 공단 지대의 그 건물은 그대로였다. 시집을 닫는 마지막 시 「죄송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118-119쪽)의 1-4연이다.

 

그 시인은 나에 대해 모르지만 그날은 이랬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몸을 일으켜 작업복을 입었다 / 늦을까봐 / 애태우며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았다 // 작업장에는 하얀 상자가 놓여 있다 상자는 붉은 혈흔이 배어 있거나 분해되는 유기물의 냄새를 끌어안고 있다 / 어떤 상자에선 짙은 향내도 느껴져서 / 깃털 하나를 담았거나 밥공기 두어개쯤 들어 있겠지 싶었다 // 상자는 매일같이 규격화된다 상자의 무게를 재고 분류 스티커를 붙여 전산 등록을 하는 동안, 상자를 어디다 쌓아둘까요? 상자 위에 상자가 그 위에 또 그 위에 // 컨베이어에 가지런히 놓이는 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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