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그림자의 위로

대빈창 2024. 2. 15. 07:30

 

책이름 : 그림자의 위로

지은이 : 김종진

펴낸곳 : 효형출판

 

건축가 김종진은 오랫동안 빛과 어둠이 지닌 음영의 건축공간을 찾아 다녔다. 그는 이들 공간에서 인간이 느끼는 슬픔과 기쁨, 아픔과 행복, 삶과 죽음 등이 미묘하게 뒤엉켜 있음을 느꼈다. 부제 ‘빛을 향한 건축 순례’가 말해주듯 『그림자의 위로』는 빛을 담은 공간들을 답사하고 사색한 에세이였다. 건축가는 빛을 침묵, 예술, 치유, 생명, 지혜, 기억, 구원, 안식의 여덟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남프랑스 프로방스의 르 토로네 수도원(Le Thoronet Abbey)은 대략 1176-1200년 사이에 지어졌다. 설계한 건축가는 현재까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토로네 수도원 예배당의 빛은 좁을 돌 틈으로 들어오는 희미하고 은은한 빛이다. 그것은 사람을 고요한 사색으로 이끄는 힘이 있었다. 장식 없는 순수한 공간 형태, 빛과 그림자가 만드는 공간 깊이는 토로네 수도원 곳곳에서 일관되게 나타났다.

건축주 카를 하인리히 뮐러(Karl-Heinrich Müller)는 1982년, 라인강 지류 에르프트강 서쪽의 길이 600미터 정도의 대지를 구입했다. 독일 인젤 홈브로이히 미술관(Museum Insel Hombroich)을 설계한 조각가 에르빈 에리히(Erwin Heerich)는 오솔길을 따라 1․2층 정도의 아담함 파빌리온 열 개를 배치했다. 낡은 재활용 벽돌로 외부를 마감해 자연과 어우러지도록 했다.  습지와 개울이 많아 섬이라고 불리는 땅은 미술관 짓기에 부족했다. 뭘러와 에리히는 자연이 예술만큼 중요한 살아있는 장소를 건축했다.

스위스 알프스 테르메 발스(Therme Vals) 온천장은 스위스 건축가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가 설계했다. 온천장 내부와 외부 모두 발스 지역에서 나는 얇은 회색 돌 규암으로 쌓았다. 길이 1미터 단위로 재단한 규암 판 6만개를 쌓아 건축을 완성했다. 단단한 암석을 파내어 만든 공간은 깊은 그늘과 짙은 어둠을 드리워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테르메 발스는 자연과 건축, 빛과 어둠, 목욕과 휴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감각의 공간, 치유의 장소’였다.

멕시코 길라르디 주택(Gilardi House)을 설계한 루이스 바라간(Luis Barragán)은 스케치와 도면을 통한 간접 표현보다 오감을 통한 직접 경험으로 설계했다. 건축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 바라간은 자신의 몸과 감각으로 건축을 스스로 배워 나갔다. 1975년 루크와 길라르디는 멕시코 도심 차풀테펙 국립공원 옆 주택부지를 마련했다. 도로에 면한 쪽이 10미터, 안으로 36미터 길이의 긴 직사각형 땅이었다. 바라간의 마지막 주택 작품은 고요한 침묵과 평온 속에서 사람과 자연이 조화롭게 살아가길 원했다.

미국 필립스 엑시티 아카데미 도서관(Phillips Exeter Academy Library)은 루이스 칸(Louis Kahn)이 설계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고등학교 도서관이었다. 칸은 건축을 세상에 봉헌하는 장소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드러운 변화를 주는 나선계단, 하늘로 향하는 중정, 빛과 사람을 마주보게 하는 열람대, 나만의 공간을 만드는 캐럴을 하나하나 세심하고 사려 깊게 디자인했다. 미국건축가협회는 1997년 〈25년상〉에 도서관을 선정했다. 25년 동안 잘 사용된 충분한 가치와 검증을 이겨낸 건물에, 1년에 단 한번 수여하는 상이었다.

미국 맨해튼 911 메모리얼(911 Memorial)은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건물(110층)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9․11 테러 추모재단은 추모장소 국제설계경기를 개최했다. 총 63개국의 건축가들이 5,201개의 설계안을 제출했다. 국제공모전 사상 가장 많은 참가작이었다. 당선작은 건축가 마이클 아라드(Michel Arad)와 조경가 피터 워커(Peter Walker)이 설계한 〈리플렉팅 앱센스 Reflecting Absence)였다. 낙하하는 수많은 물줄기와 그 물 하나하나를 타고 올라오는 빛, 물과 빛, 낙하와 상승이 교차했다.

네덜란드 남쪽 끝 마멜리스(Mamelis) 수도원은 수도사․건축가 한스 반 데어 란(Hans Van der Laan)이 설계했다. 반 데어란(1904-1991)은 1956년 수도원으로 옮겨 수도원 중축 프로젝트 대부분을 도맡아 진행했다. 87세로 작고할 때까지 수도원을 떠나지 않았다. 건축은 그에게 신이 창조한 세계를 살아있는 그대로 느끼게 해주는 특별한 성소를 만드는 일이었다. 수도사 건축가는 건축 공간이,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체가 되길 원했다.

스웨덴 스톡홀름 외곽 우드랜드 공원묘지(Woodland Cemetery)는 문화적․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14년 공원묘지국제설계공모전에 유럽 여러 나라에서 53개안이 제출되었다. 당선작은 30대 초반의 젊은 건축가들 에릭 군나드 아스푸룬드(Erick Gunnar Asplund)와 시구르트 레베렌츠(Sigurd Lewerentz)의 공동제출안이었다. 이들은 유행을 따르지않고 그들이 자라온 자연과 문화에서 답을 찾았다. 공원묘지는 삶과 죽음, 낮과 밤, 빛과 어둠을 오가는 우주의 순환구조를 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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