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대빈창 2024. 3. 5. 07:00

 

책이름 :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지은이 : 존 버거

옮긴이 : 김우룡

펴낸곳 : 열화당

 

소설가․사회비평가․미술평론가 존 버거(John Berger, 1926-2017)의 책은 모두 24종이 국내에서 발간되었다.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은 기존 아카데미의 보는 방법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한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에 이어, 나에게 두 번째 책이었다. 작가가 이름붙인 PHOTOCOPIES(사진 복사)는 직간접적으로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을 치밀한 시각적 산문을 통해 마치 사진을 찍듯이 생생하게 그려냈다. 스물아홉 편의 글을 담았다.

「자두나무 곁의 두 사람」은 스페인 갈리시아에서 온 교회벽화 복원가 여인. 「무릎에 개를 올려놓고 있는 여인」은 이십대 초반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죽은 아들을 위해 삼십 년 동안 상복을 입은, 삼년 전 죽은 안젤린. 「오마 가는 길」은 더블린에서 데리까지 가는 시골버스에서 만난 수다스러운 십대 임신녀 캐슬린. 「라코스테 스웨터를 입은 남자」는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시간에 만난 키 크고 마른 체구의 사십대 중반 남자. 「턱을 괴고 있는 젊은 여자」는 작가가 목탄으로 초상을 그려 준, 베토벤 후기 소나타 연주를 마친 스물한 살의 이주민 음악가 여자. 「가죽옷에 경주용 헬멧을 쓴 채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남자」는 세계 상위 랭커로서 레이스 사고로 무릎아래 다리를 절단한, 영국 페이스 원 팀 소속 첫 번째 모터사이클 레이서 사이먼 버크매스터.

「바위 아래 개 두 마리」는 마드리드 북쪽 엘 레켄코 계곡의 소몰이꾼 안토닌은 평생 눈물을 딱 두 번 흘렸는데, 어머니의 죽음과 작가의 친구 토니오 초대로 식사를 하고 나서. 「르 코르뷔지에가 지은 집」은 이십칠 년 동안을 강제수용소에서 보내며 백스물네 번을 옮겨 다닌 친구 앙드레. 「자전거를 탄 여인」은 자전거 추돌사고 무릎을 다친, 받지 않고 주고만 싶어 하는 푸른 눈동자의 회색 곱슬머리 방랑자 여인.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남자」는 지하철의 장님 아내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십대 초반 사내의 연설. 「풀밭 위의 그림」은 교회벽화 복원가 마리사 카리노의 갈리시아 작은집 풀밭에 놓인 그림들.  「시편 139: “당신은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니···”」는 나체 여자가 춤을 추는 목탄으로 그린 그림 한 점.

「거리의 배우」는 3월의 끝자락 바르셀로나 람블라스 거리의 미동도 않는, 안경을 끼고 가발을 쓴 허수아비 역의 남자. 「잔에 담긴 꽃 한 묶음」은 인생의 삼분의 일을 해발 천칠백 미터 고도에서 소와 함께 보낸 마르셀의 오두막에서 꺾어온 야생화로 애도를 표하는 작가. 「길가에 엉켜 쓰러진 두 남자」는 독립 인도가 분단되어 파키스탄으로 향하는 난민행렬에 만난 이슬람교도 모하메드 브라힘과 난민 지도자 아편쟁이 무사. 「말고삐를 든 남자」는 중환자실에서 고통에 시달리다 죽어 간 젖소를 키웠던 테오필. 「시프노스 섬」은 고전적 조각가들의 이상적 조각상도 실상은 쓸쓸한 육체에 대한 위로. 「전구를 그린 그림」은 샤트네 말라브리에 로스티아 스튜디오의 전깃줄에 매달려있는 전구와 전등갓을 그린 그림.

「안티고네를 닮은 여자」는 1943년 8월, 요양소에서 단식으로 서른네 살에 죽은 철학자 시몬 베유. 「얘기하고 있는 친구」는 발쥐프 병원에서 목소리를 못 낸지 사흘 만에 죽은, 파리시가 마련해준 시민아파트 스튜디오에서 사랑하는 구진과 살았던 아비딘 디노. 「소 곁에 앉은 두 남자」는 새해 첫날, 난산의 블랑켓을 어렵게 해산시켰지만 죽은 송아지를 보리수나무 밑에 묻고, 배앓이 다치스를 민간요법으로 치료하고 기다리는 루이. 「가슴을 풀어헤친 남자」는 아크로폴리스아래 그리스의 오모니아 구역, 먼지를 뒤집어 쓴 중고품 시장의 흰 지팡이를 들고 셔츠의 단추를 풀어헤친 장님 남자. 「사빈 산맥의 집 한 채」는 사십년이나 비었던 굽이치는 긴 구릉의 꼭대기 마지막 집, 재스민 묘목 한 그루를 심는 친구 리카르도의 어머니. 

「바구니 안의 고양이 두 마리」는 1883년 석수石手 장 마리가 완공한 집의 모녀 고양이 두 마리가 서로 안은 채 잠든, 난로 뒤쪽 땔감나무가 반쯤 담긴 장바구니. 「샤프카를 쓴 젊은 여인」은 1993년 벨르이 돔(구소련의회건물)을 방어하기 위해, 바로 직전에 죽은 병사에게서 벗긴 샤프카를 쓴 여인. 「식사 테이블에서」는 연극을 하는 러시아 친구들과의 파리 막심 레스토랑 식사․스페인 북서부 끝 베탄소스의 작은 갈리시아 마을의 장날 간이식당. 「19호실」은 그림을 그리는 사십년 친구 스방의 방, 엘리베이터 없는 가파른 층계의 파리 14구 프랭탕 호텔 삼층 19호실. 「반군 사령관」은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IV)을 위해 쓴 마르코스 부사령관의 편지와 성명서 모음.

현대사회에서 사진의 역할.철학에 대한 탁월한 견해의 소유자였던 수전 손택(Susan Sontag, 1933-2004)은 마르크스 인본주의자 존 버거를 이렇게 평했다. “오늘날 영어권 작가들 중에서 존 버거가 으뜸이다. D. H. 로렌스 이래로 양심의 명령에 따라 책임감을 갖고 세속 세계를 이만큼 주의 깊게 쓴 작가는 없다. 시인으로선 로렌스보다 다소 떨어지겠지만 존 버거는 로렌스보다 더 지적이며 더 시민적이며 더 기품이 있다. 그는 놀라운 예술가이며 사상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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