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빛 혹은 그림자
엮은이 : 로런스 블록
옮긴이 : 이진
펴낸곳 : 문학동네
미국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는 현대 미국인의 삶과 고독, 상실감을 탁월하게 화폭에 담았다. 엮은이 로런스 블록(Lawrence Block, 1938- )은 말했다. “호퍼는 캔버스 위에 펼쳐진 시간 속의 한순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거기엔 분명히 과거가 있고 미래가 있지만, 그것을 찾아내는 일은 우리 자신의 몫”(11쪽)이다. 『빛 혹은 그림자』는 호퍼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단편소설) 17편의 앤솔러지였다. 17명 작가의 스릴러, 드라마, 범죄소설, 미스터리, 환상문학 등 다양한 색깔을 가진 작품모음집이 되었다. 호퍼의 그림은 작품 전체를 표현하거나, 이야기 속 한 장면을 그렸다.
메건 애벗의 「누드 쇼」〈누드 쇼, 1941〉 - 반짝이는 갈색 단발, 크림색을 띤 분홍빛 몸, 풍만하게 솟아오른 젖가슴, 날개를 펼친 한 마리 새처럼 두 팔을 들고, 기다란 파란색 천을 뒤로 펄럭인다. 질 D. 블록의 「캐럴라인 이야기」 〈여름날의 저녁, 1947〉 - 내가 임신을 했어요. 졸업반으로 올라가기 전 여름에요.······ 두 사람이 나를 도체스터의 어딘가로 보냈어요. 세인트메리 미혼모의 집. 로버트 올렌 버틀러의 「푸른 저녁」〈푸른 저녁, 1914〉 - 내가 한눈을 파는 사이 어릿광대가 완벽한 침묵 속에 베란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 오른편에 앉아있던 르클레르 대령은, 호텔에서 싱그럽게 단장을 하고 나와 그에게 교태를 부리기 위해 멈춰 선 솔랑주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리 차일드의 「사건의 전말」〈호텔 로비, 1943〉 - 다른 여자가 의자에 앉았고 부인은 계속 잡지를 읽었어요. 다른 여자가 고개를 들고 셔먼에게 뭐라고 얘기를 했어요. 니컬러스 크리스토퍼의 「바닷가 방」〈바닷가 방, 1951〉 - 그 문은 바다를 통해서만 들어올 수 있는 문이었다. 화창한 날 그 문을 활짝 열어놓으면 사선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바다 가까이에 있는 벽의 절반을 대각선으로 비추었다. 마이클 코널리의 「밤을 새우는 사람들」〈밤을 새우는 사람들, 1942〉 - 그 전날, 그는 그녀가 반복해서 고개를 들고 그림을 쳐다보면서 노트에 스케치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데 놀랐다. 그녀는 글을 쓰고 있었다.
제프리 디버의 「11월 10일의 사건」〈선로 옆 호텔, 1952〉 - 여자는 무릎에 책을 올려놓은 채 앉아 있었고 장밋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습니다. 바지에 셔츠, 조끼를 입은 남자가 그 곁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크레이그 퍼거슨의 「직업인의 자세」〈사우스트루로 교회, 1930〉 - 사람들이 절망에 정신을 놓지 않게 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그래서 더이상 그 거짓말을 믿지 않게 된 뒤에도 계속 목사로 남았다. 스티븐 킹의 「음악의 방」〈뉴욕의 방, 1932〉 - 앤더비 씨는 〈뉴욕 저널 아메리칸〉을 읽고 있었다.······ 앤더비 부인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조 R. 랜스데일의 「영사기사」〈뉴욕 영화, 1939〉 - 그러나 이름이 샐리인 이 좌석 안내원은 영화 속 여자들을 먹다 남은 햄이나 치즈처럼 보이게 만든다.······ 긴 금발에 도자기 인형처럼 피부가 곱다. 게일 레빈의 「목사의 소장품」〈도시의 지붕들, 1932〉 - 한번은 그녀가 나빠진 시력으로 간신히 스튜디오를 돌아디니고 있는 상태였을 때 그녀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에드워드가 팔지 않은 그림 한 점을 챙겼다. 1932년 작 〈도시의 지붕들〉이라는 작품이었다. 워런 무어의 「밤의 사무실」〈밤의 사무실, 1940〉 - 몸매가 드러나는 파란 드레스―그녀가 가장 좋아하는―조차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서류 문서들을 서류 보관용 캐비닛에 넣고 한쪽 팔을, 폴더 위에 올려놓았다.
조이스 캐럴 오츠의 「창가의 여자」〈오전 열한시, 1926〉 - 마치 이 방의 벽지처럼, 그리고 탁한 초록색 카펫처럼, 그리고 푹신한 파란 플러시 천 의자처럼―낡았다. 크리스 넬스콧의 「정물화 1931」〈호텔방, 1931〉 - 그녀는 신문을 책상 위에 던져놓고 모자를 벗어서 어느새 모자 자리가 되어버린 서랍장 위에 올려놓았다. 드레스를 벗어 구겨지지 않게 걸어두었다.······ 대신 그녀는 열차 운행 시간표를 집어들었다. 조너선 샌들로퍼의 「밤의 창문」〈밤의 창문, 1928〉 - 핑크색 슬립을 입은 여자가 몸을 숙이고, 그녀의 엉덩이가 정면으로 그를 향한다.······ 그는 윗입술의 땀을 닦아내며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세 칸의 창문을, 그만의 전용 극장을 바라본다.
저스틴 스콧의 「햇빛 속의 여인」〈햇빛 속의 여인, 1961〉 - 아침 햇살 속에서 담배를 피우는 발가벗은 여자. 그녀는 싱글베드 옆에 서 있었다. 침대 아래 하이힐이 있었다. 로런스 블록의 「자동판매기 식당의 가을」〈자동판매기 식당, 1927〉 - 42번가의 식당에 들어설 때 모자와 코트가 당신이 숙녀임을 선포한다······ 그러고는 잔을 쟁반 위에 놓고 다시 숨을 들이쉬었다. 표지그림 〈케이프코드의 아침, 1950〉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없다. 초대를 수락했던 호퍼의 열렬한 팬의 한사람이었던 작가가 결국 소설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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