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
지은이 : 문인수
펴낸곳 : 창비
내가 잡은 시인 故 문인수(文仁洙, 1945-2021)의 두 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1985년 문예지 『심상』 신인상으로 시단에 나왔다. 불혹을 넘긴 만 41세의 늦깍이 등단이었다.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는 칠순과 시력詩歷 30주년을 맞은 시인의 열한 번째 시집이었다. 시집은 “응축된 언어에 실린 진지한 성찰과 곧은 시정신의 기품으로 서정의 미학을 펼쳤다”고 평가받았다.
시집은 4부에 나뉘어 57편이 실렸다. 시인 정우영은 발문 「명랑성으로 그윽한 신명의 흔연」에서 “즐거움을 바탕 삼아 세상 살아가는 양동陽動의 기운, 신명을 이번 시집에서 신바람나는 시화詩化로 되살리고 있는 것”(102쪽)이라고 했다. 「죽도시장 비린내」(16-17쪽)에서 20여년 저쪽 포항 오어사를 찾아가는 길에 들렀던, 포항 죽도시장의 유명한 물회집을 떠올렸다. 국물을 따로 떠먹었던 물회비빔밥은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았다. 표제시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72-73쪽)는 대구 동부시외버스정류장 부근에 살면서 마음 내키는대로 묵호, 울산 방어진, 영천, 영해, 영덕, 평해, 청송, 후포 죽변······ 버스에 올라 아무 시골에서 내리는 시인을 그렸다.
시인 나희덕은 표사에서 “너무 빛나거나 반듯한 것들은 이 시집의 식솔이 되기 어렵다”고 했다. 그랬다. 통영 함박도 무릎관절 앓는 어머니, 평생 불면증으로 고생하다 교통사고로 죽은 사내, 퍼붓는 폭우 속 친구의 하관, 인도 릭샤꾼 사내와 옆구리에 아기 얹은 여자, 요양병원 인조 매트리스 위 어머니, 찜 전문식당 주인처녀의 결혼 휴업, 동대구역 대합실 소파의 작은 할머니, 전공電工 친구의 뻰찌, 시인집에 둥지를 튼 노랑 딱새 한쌍, 감꽃 목걸이를 하고픈 사십이 넘은 여자, 시인의 수전증, 생활고를 못이겨 자살한 세 모녀, 세월호 참사에서 홀로 구조된 다섯 살 어린이, 폭격으로 가족과 한 팔을 잃은 레바논 열두살 남자아이, 故 신현정 시인의 영정.
짧은 글줄을 이어가는 지금, 동터오기까지 한 시간여 남은 시각. 다랑구지 대빈창 들녘의 기러기들은 해변으로 향하는 농로 보안등 불빛을 받으며 논바닥에 흘린 알곡을 주워 먹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은 「기러기 한줄」(26쪽)의 전문이다.
길바닥에 깔린 눈 녹을 때 // 신기하다! // 애초 디디고 간 데가, 그 첫 발자국 여럿이 길게 먼저 녹는다. // 그래 기러기 한줄, // 그리고 이제 그 눈 다 녹고 없다. // 뭔, 감(感) 좇아 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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