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적막 소리
지은이 : 문인수
펴낸곳 : 창비
군립도서관의 도서대여 기간은 3주였다. 나는 일상을 도서대여 날짜를 중심으로 맞추었다. 3주에 한번 뭍에 나갔다. 병원, 약국, 은행, 문방구, 마트, 철물점, 식당 등 ······. 일을 보기 전에 두 곳의 도서관에 둘러 여덟아홉 권의 책을 빌렸다. 항상 시집 한두권을 포함시켰다. 문학평론집에서 시인을 처음 만났을 것이다.
군립도서관에 시인의 시집 세 권이 비치되었다. 내가 잡은 세 번째 시집은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이었다. 故 문인수(文仁洙, 1945-2021) 시인은 불혹의 나이에 등단했다. 시집은 ‘삶을 바라보는 깊은 통찰력과 섬세하고 감각적인 시어가 반짝이는 선명한 이미지 묘사로 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고 평가받았다. 『적막 소리』는 5부에 나뉘어 69편이 실렸다. 시인․문학평론가 권혁웅은 해설 「슬하의 시」에서 “장삼이사의 삶과 사연을 받아안되, 거기서 극한의 미를 찾아내려는 시선이 있다. ”(103쪽)고 평했다. 신경림 시인은 추천사에서 “시의 소재들은 한결같이 한물갔거나 사라져 지상에 없는 것들”이라고 말했다.
벽에 부딪혀 죽은 새끼 참새, ㄱ자로 꺾어진 노인의 발걸음, 연신 고꾸라지다 두발로 서는 새끼 누, 울산방어진 부둣가 언덕 낡은 횟집, 빈집 바람벽에 걸린 시커먼 빈 가방, 아흔 고개를 바라보는 할머니 해녀, 독일 간호부로 간 뒷집누나, 삼거리 연립상가 이층 다방, 도로를 메운 차량 사이 뻥튀기를 파는 외팔이 전직 프레스공, 스물두 살 뇌사 처녀가 쏟아낸 생리혈, 아프리카 수단 톤스의 한센인 부라스 밴드, 추운 겨울 성탄절 신문배달 소년, 역무원도 없는 시골 면소재지 변두리 간이역, 주저 앉아가는 폐가 한 채, 인도 갠지스강 화장장 불가촉천민의 운구.
4부에 모량역 연작시(거울, 새, 시간표, 운임표, 지층, 하품) 7편이 실렸다. 가장 마음에 와닿은 시구는 「동행」(12-13쪽)의 마지막 행行이었다. ‘사람하고 헤어지는 일이 늙어갈수록 힘겨워진다. 자꾸, 못 헤어진다.’ 봄 햇살이 퍼지면서 개펄 깊숙이 몸을 숨겼던 상합들이 점차 표면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조개 잡는 섬주민들이 물 빠진 개펄에 길을 냈다. 마지막은 「만금의 낭자한 발자국들」(14쪽)의 전문이다.
개펄을 걸어나오는 여자들의 동작이 몹시 지쳐 있다. / 한 짐씩 조개를 캔 대신 아예 입을 모두 묻어버린 것일까, / 말이 없다. 소형 트럭 두 대가 여자들과 여자들의 등짐을, / 개펄의 가장 무거운 부위를 싣고 사라졌다. // 트럭 두 대가 꽉꽉 채워 싣고 갔지만 뻘에 바닥을 삐댄 발자국들, / 그 穴들 그대로 남아 / 낭자하다. 생활에 대해 앞앞이 키조개처럼 달라붙은 험구, / 함구다. 깜깜하게 오므린 저 여자들의 깊은 하복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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