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절기는 태양은 적도 위를 똑바로 비추고, 지구상에서는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春分이다. 지난겨울은 눈도 많았고, 기온이 크게 떨어진 날이 며칠이고 계속되어 동장군이 기세를 떨쳤다. 겨우내 땅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흙살이 부드러워졌을 것이다. 이미지는 대빈창 다랑구지 들녘이다. 나는 지주地主였다. 우리 논 세 필지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899㎡, 2582㎡. 783㎡. 10평이 부족한 1,300평이었다. 며칠 전부터 우리 논을 부칠 마음을 드러냈던 배너미 형님 댁을 찾아갔다. 문이 잠겼다. 전화를 넣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뭍에 출타중이었다.
“형님이 우리 논 부치시죠”
작년까지 논을 부치던 뒷집 형이 쓰러져 대처의 대학병원에 입원한 지가 반년이 흘렀고 끝내 저 세상으로 떠났다. 주말마다 아들이 섬에 둘러 논배미를 살폈다. 도시에서 직장을 다니면서 남의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올해부터 못자리를 않고 강화도 육묘공장의 싹을 틔운 모판을 들여와 못자리에 앉힐 것이다. 부직포를 씌운 모가 자라면 이앙기로 본답에 바로 모를 낼 것이다. 아무리 섬이라도 기계영농화된 벼농사는, 농기계 한 대 없는 나로서는 작은 면적이라도 농사에 달려들 엄두를 못냈다.
땅문서를 새삼 펼치니 나의 명의로 이전된 날짜가 15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진입로도 없는 맹지였다. 세상물정 모르는 청맹과니가 논주인이 된 사정이 있었다. 섬에 들어왔을 때 나의 수중에 유산으로 물려받은 돈이 있었다. 사정이 하도 딱하여 이자도 없이 돈을 빌려 주었다. 두 해가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는 빚쟁이였다. 나에게 넘어온 논 세 필지도 지역농협에 근저당이 잡혀 있었다.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해 가장 비싼 땅값을 치르고 내 앞으로 등기이전시켰다. 한 평생을 농사일로 살아오신 어머니가 식량걱정 없다고 좋아하실 것만 같았다.
전 주인은 농사짓던 대로 다시 우리 집 논을 도지지었다. 그가 돌아가시고 뒷집 형이 우리 논을 맡았다. 이번에 경작자가 세 번째 바뀌었다. 저수지가 없는 다랑구지 들녘은 지하수로 수도작을 지었다. 논두렁 군데군데 전봇대가 서있다. 나는 논을 맡기면서 말했다.
“남들만치 주세요.”
그동안 나는 쌀로 네 가마만 받았다. 경작자가 공짜로 농사짓는다고 주위에서 말이 돌았다. 나는 진즉 욕심을 접었다. 우리 집과 작은형댁 일 년 식량으로 충분했다. 나는 논 위치도 첫 경작자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돈이 없으면 돈을 안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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