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대빈창 2024. 7. 19. 07:00

 

책이름 :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지은이 : 도정일

펴낸곳 : 문학동네

 

어느 시집에서 문학평론가 도정일(都正一, 1941- )의 산문집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에서 인용한 구절을 만났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의 책을, 자칭 활자중독자가 한 권도 손에 잡지 못했다니. 저자가 문학평론가로 자리 잡은 책은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1994)일 것이다. 그는 책의 출간에 너무 인색했다. 위 평론집과 『시장전체주의의 문명과 야만』(2008)이 전부였다.

《문학동네》에서 ‘도정일문학선’ 시리즈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나는 군립도서관에서 ‘시리즈 1․2권’을 대여했다. 두 권은 산문집으로 1993-2003년까지 약 20여년에 걸쳐 각종 언론매체에 발표된 글들을 엮었다. 1권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은 4부에 나뉘어 91편의 글을 담았다. 2-6쪽의 짧은 글들은 읽기에 부담이 없었다. 단 3편만이 장문長文(?)이었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인간의 보편적 운명을 탐색한 장편소설 『순교자』의 해설, 「소설 『순교자』의 미스터리」 9쪽.

한국인의 ‘천박한 낙천성’, 「기억과 망각의 변증법」 12쪽.

‘6․15 평양선언’은 전후체제를 종식시키기 위한 약속, 「배척의 정치를 넘어서―남북 공존의 문화정치」 8쪽.

1부 ‘선물의 도착’은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푸짐하게 펼쳐졌다. 너는 누구냐고 내께 묻는 책이 인생을 바꾸는 책 「누구시더라?」에서,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의 〈희생〉(1986)은 구원을 위한 상징적 행위․영화적 실천을 이야기한 「죽은 나무에 물 주는 소년」까지 26편.

2부 ‘쓸쓸함이여 스승이여’는 행복의 역설, 유용성과 무용성 등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안주하지 않는 대학 생활의 정신적 성취 「여행자의 깨침」에서, 지식행상이 아닌 ‘스승’ 「이 시대의 스승상을 말하기」까지 17편.

3부 ‘관계의 건축학’은 인문학과 문학, 교육, 기억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인문학적 사유의 네 가지 인간․사회․역사․문명에 대한 책임 「인문학적 사유의 네 가지 책임」에서, 단군 이래 최고의 개인주의적 성향을 가진 세대 「하버드 대학생들의 눈물」까지 23편.

4부 ‘사회는 언제 실패하는가’는 정치․시사 이슈에 대한 저자의 단상을 모았다. 노무현의 죽음이 우리 사회에 남긴 과제 「노무현의 질문」에서, 월드컵 붉은 물결 속으로 몰아넣는 기이한 애국주의 열풍 「월드컵, 환상과 광기의 서사구조」까지 25편.

표제는 수천만 한국인들이 고향을 찾아가는 명절, 「보름달은 왜 뜨는가」(35-38쪽)의 문장에서 가져왔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에는 세상이 돈 안 된다고 멸시하는 것들, 고향집 누렁이 황소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 조선 토끼들이 달나라에 올라가 떡방아찧겠다고 아이들에게 얘기하는 것, 고향에서 1년에 하루만이라도 돈되지 않는 것들만 골라 생각해보는 일이었다.

마지막은 책을 읽으며 밑줄 친 문장에서 하나를 꼽으라면 “인간, 사회, 자연, 문명, 역사에 대한 나의 책임을 망각하지 않는 능력의 형성, 그것이 성숙이다.”(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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