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향문천의 한국어 비사秘史

대빈창 2024. 9. 11. 07:00

 

 

책이름 : 향문천의 한국어 비사秘史

지은이 : 향문천

펴낸곳 : 김영사

 

부제 ‘천 년간 풀지 못한 한국어의 수수께끼’ 그리고 표제의 비사秘史를 보며 나의 지적 호기심은 한껏 부풀었다. 한글은 1443년(세종 25년)에 창제되어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반포되었다. 집현전(集賢殿) 학자들은 한글창제에 기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등장한다는 기원전 22세기 고조선에서 만들었다는 가림토加臨土 문자를 떠올렸다.

세종대왕은 천재였다. 하지만 한글 창제의 원리가 불현듯 떠올랐을 수는 없었다. 분명 토대가 되었을 바탕 언어가 존재했을 것이다. 우리는 아직 한글이 고대 어느 나라 말에서 유래했는지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군립도서관 희망도서를 신청했고, 부푼 마음으로 새 책을 펼쳤다. 낯선 이름 ‘향문천響文泉―글을 울리는 샘’은 역사언어학 분야의 전문 You Tuve의 필명, 채널 이름이었다. 국내 최대의 17만6천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언어 관련 콘텐츠였다. 2020. 8. 21. 출판사 《김영사》로부터, ‘한중일 언어 인문학’이라는 키워드로 출간 제의를 받았다.

책은 한국어의 기원과 계통을 둘러싼 오해와 잘못된 통념, 역사적 사건들과 지정학적 요인이 한국어에 미친 영향, 언어와 언어와의 접촉․교류에서 오는 영향 등을 추적했다. 4부로 구성되었고, 부록 3편까지 40 꼭지를 담았다. 1부 한국어에 얽힌 오해. 한국어의 기원을 밝히는 것이 한국어 역사언어학의 궁극적인 목표. 현대 한국어는 ‘신라어’의 동포이지만 후예는 아니다. 역사언어학에서 주시되는 계통론은 언어 간의 친연관계, 즉 유전적 관계를 밝히는 연구분야.

2부 고대 한국어의 중심성. 우리말 메주와 일본어 [미소未醬]는 같은 단어에서 파생. 여진어 [미수]와 만주어 [미순]은 현대 한국어 메주에 대응되는 한국어족 차용어. 백제를 경유해 미소라는 식품과 단어를 차용했을 일본어와 고구려를 통해 [미수]를 차용했을 여진어를 통해, 백제의 언어와 고구려의 언어가 동질적이거나 아주 가까웠을 것으로 짐작. 주변 언어로 확산된 차용어를 통해 한국어에서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진 파생 어휘를 재구성. 불교 유입 후 한반도 국가에서 싹튼 독자적인 불교 용어는 주변 세력에 영향을 주어 일본어와 여진어의 ‘부처’와 ‘절’을 의미하는 한국어족 차용어. 한국어와 주변 북방 민족 언어에서 나타나는 유사한 어휘 대부분은 고대 이래의 접촉 및 교류, 대립에 의해 발생한 차용어. 일본․류큐어족 집단은 중국 남부 지방에서 점점 북진해 산둥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한반도 북부에 다다른 다음 현재의 일본 열도 이주. 방랑어는 어족과 무관하게 아주넓은 지리적 분포를 갖는 단어로 송골, 스라소니, 수라 등은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걸친 언어에서 관찰. 사서오경의 사서 종류 및 실용회화서로 한학서인 『노걸대老乞大』는 전근대 동양의 ‘로제타석’.

3부 고유명의 세계. 고대 한국어의 비밀을 밝히는데 고유명이 갖는 의미. 고대 한국어에서 고유하게 사용되었던 사람의 이름, 땅의 이름, 관직의 칭호 등은 한문으로 번역될 수 없었고, 이들은 주로 차차 표기, 즉 한자의 발음을 빌려서 적은 형태로 문헌기록에 남았다. 2013년 금관총 출토 환두대도에서 아마도 피장자의 이름 네 글자 명문 이사지왕尒斯智王 발견, 역사언어학적 관점으로 볼 때 이사지왕은 신라의 제20대왕 자비 마립간.

4부 격변하는 근대. 일본의 철저한 번역주의는 서양 서적의 표준적인 번역어로 수많은 단어가 창조되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독자의 혼란을 줄였다. 근대의 번역어는 현대 일본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상어휘가 되었고, 한국어와 중국어에 대거 유입되어 동아시아 공통 어휘로 자리 잡았다. 이는 일본이 한자문화권 국가 중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빠르게 근대화를 이루었기에 발생한 현상.

부록으로 You Tuve 채널에서 큰 반향을 불러 온 ‘《동제(거란소자)명 원형경》의 해석과 근거’를 비롯해 거란소자 자소 목록과, 대한민국의 약자 제정사를 실었다. 나에게 고대 한국어를 다룬 앞부분은 흥미로웠으나, 근대 이후를 다룬 뒷부분은 지리멸렬했다. 하지만 언어학 전공자가 아닌 젊은 필자가 이 정도의 책을 써냈다는 것이 대단했다. 저자는 어려서부터 해외에 거주하며 역사언어학에 관심을 갖고, 여러 언어를 익혔다고 한다. 책의 내용은 새로운 주장이 아니라, 그간 국내외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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