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사진관집 이층

대빈창 2024. 6. 24. 07:00

 

책이름 : 사진관집 이층

지은이 : 신경림

펴낸곳 : 창비

 

시인 신경림(申庚林, 1935-2024) 선생이 지난 5월 22일 89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우리는 대표 민중 시인을 잃었다. 내가 처음 만난 시인의 책은 학창시절, 두 권의 『민요기행』이었다. 그리고 어느 책에서 접하고 슬며시 웃음을 지었던 아래의 글줄이었다. ○경림, ○병란, ○기숙. 성을 빼고 이름 두자만 보면 영락없이 여자 이름이었다. 군홧발 정권의 무지막지한 철권통치가 횡행했던 1980년대, 반독재 투쟁 전선의 대표 문인들이었다. 시인 신경림․문병란, 소설가 송기숙 선생이 주인공이었다.

많은 세월이 흘렀고, 나는 선생의 첫 시집 ‘창비시선’ 1호 『농무農舞』와 선생의 가슴 저린 사연의 시를 표제로 삼은 다섯 번째 시집 『가난한 사랑노래』를 펼쳤다. 선생이 돌아가시고, 그동안 선생의 시집에 소원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군립도서관 검색창에 선생의 성함을 입력했다. 시간적 여유를 갖고 천천히 한권 두권 비치된 책들을 대여할 것이다. 선생은 약관의 나이 20세에 문단에 등단했다. 10년 세월동안 전국을 떠돌아다닌, 노동 현장의 체험이 시적 자산이 되었다.

그리고 첫 시집 『농무』가 나왔다. 선생의 시편들은 당대의 문학과 사회 현실을 묶어내는 ‘민중문학’의 새로운 흐름을 일구었다. 산업화․도시화 과정에서 소외된 소농, 고향에서 야반도주로 서울 달동네에 정착한 변두리 이농민,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유랑민의 애환과 굴곡진 삶을 친근하고 질박한 언어로 노래했다.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은 선생의 열한번째 시집으로 마지막 시집이기도 했다. 4부에 나뉘어 53편이 실렸다. 시인 박성우는 추천사에서 “서러운 행복과 애잔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시집이라고 했다. 1부의 시들은 가족과 일가친척, 고향의 풍물을 노래했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서른해동안 오간 어머니, 할머니․삼촌이 국수틀을 돌리는 가계, 광부 식구들이 몰려와 잔칫날같던 장날, 중풍으로 다리를 저는 시인, 망령 난 구십노모, 산비알 무허가촌 부엌이 없는 사글셋방, 동네 봉제공장에서 얻어온 옷가지에 단추를 다는 아내, 늘 같은 소리만 하는 할머니, 찔레꽃 향기 첫사랑 소녀······.

 

3부의 시들은 시인의 발길이 닿았던 백두산, 사하라 오벨리스크,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우크라이나 끼예프 드네쁘르 강․보그들라브 강, 아우슈비츠 수용소, 폴란드 비엘리치카 소금 광산, 이르꾸쯔끄 등 여행 시편이었다. 문학평론가 이경철은 발문 「더불어 어우러지며 순정으로 여는 대동세상」에서 서울 강남 봉은사 전각 〈판전板殿〉의 글씨에 빗대어 ‘고졸古拙한 멋’에 비유했다.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 낙관과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에 쓴 글씨였다. 얼핏보면 글씨를 배우는 아이가 쓴 것 같았다. 나이 팔순에 시력詩歷 환갑을 앞두고 상재한 시집의 시편들은 고졸했다. ‘민중적 서정시’의 별이었던 시인이 영면하셨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마지막은 「별」(47쪽)의 전문이다.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 / 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 // 하늘에 별이 보이니 /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고 /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니 / 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 // 반짝반짝 탁한 하늘에 별이 보인다 / 눈 밝아 보이지 않던 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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