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이름 :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지은이 : 성석제
펴낸곳 : 창작과비평사
20여년 전 한꺼번에 손에 넣은 작가 성석제(成碩濟, 1960- )의 소설집 4권, 장편掌篇 소설 2권에서 두 번째로 손에 펼친 책이다. 오래 묵었다. 출판사가 옛 이름 《창작과비평사》였다. 초판본 15쇄로 발행일이 2003. 2. 20.이었다. 〈제2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인 표제작을 비롯한 7편의 중·단편이 실렸다. 소설들은 기이하고 괴怪한 인물들이 이끌었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의 황만근의 별명은 ‘백분(번), 찝원(십원), 여끈(열 근), 팔 푼, 두 바리(마리)’이었다. 황만근이 사는 신대1리(새터말)는 황씨들이 50여호 모여사는 집성촌이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그에게 어미는 항렬을 따서 이름을 지어 줄 사람이 없어서, 만근산萬根山에서 이름을 땄다. 아비는 전쟁 중에 포탄 구경 나갔다가 유탄에 맞아죽었고, 어미는 놀라 여덟달 만에 만근을 낳았다. 백번은 만근이 땅바닥에 넘어진 횟수, 찝원은 혀가 짧은 만근이 십원을 발음하는 소리, 바리는 자기 가족수를 가리켰다. 그는 사계절을 엉덩이 하나 걸치기도 힘든 비좁은 마루에서 잤다. 황만근은 입영 신체검사를 받고 어두워서 돌아오다 토끼고개에서 토끼 귀신을 만났다. 귀신의 조화로 색시를 얻고 아들을 낳았다. 색시는 읍내 농기계상 수양딸로 몸을 버려 저수지에 자살하는 것을 황만근이 구해주었다. 마을 최초로 경운기를 혼수품으로 가져온 여자는 어느날 집을 나갔다. 동네의 일, 궂은 일, 남의 일은 항상 황만근의 몫이었다. 염습, 산역, 벽돌 찍기, 마을 풀깍이, 도랑청소, 공동우물청소, 용왕제 제물 돼지잡기……. 〈농가부채 해결을 위한 전국농민 총궐기대회〉에 고물 경운기를 몰고 참석한 황만근이 돌아오지 못했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 반나절이나 걸리는 궐기대회가 열리는 군청까지 갔다. 돌아오는 길 날은 어두워졌고 경운기는 길옆 논으로 떨어졌다. 황만근은 뼛속까지 시리는 추위속에서 막걸리에 취해 경운기를 지켰고 졸음을 이기지 못했다. 새터말에 귀농했다가 다시 돌아간 민씨는 존엄한 문장으로 묘비명墓碑銘을 지어 황만근의 넋을 위로했다.
「천애윤락天涯淪落」은 중국 시인 백낙천(白樂天, 772-846)의 〈비파행琵琶行〉에 나오는 구절이다. 소설에 나오는 재택근무하는 주부主夫 기옥과 법률사무소에 다니는 문학, 그리고 동환은 초등학교 동창이다. 이십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동환은 기옥의 의견을 물으려면 문학이 먼저 기옥과 통화하여 괜찮다는 말을 들어야, 이어서 모기만한 소리로 통화를 했다. 동환은 초등학교 시절, 부유한 사업가 아버지의 덕으로 호강했으나, 중학교 때 부친의 사업이 망해 학업을 중도포기했다. 그후 콜걸 알선, 술집 운영을 전전했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의처증이 심한 아내와의 늦은 결혼식이었다. 부조금을 장사밑천으로 삼겠다는 계획은 스무명 밖에 오지 않은 하객으로 적자가 나고 말았다.
「쾌할 냇가의 명랑한 곗날」의 〈상호친목계〉는‘한 번 계원이 되면 상호간에 평생 친구가 되어 목숨을 걸고 서로를 지키는 계’의 준말이었다. 계원들은 자영업을 하거나, 다른 계원과 동업 사이거나 백수였다. 쾌활快闊 냇가는 초대회장·증경회장이 태어난 집이 냇가에 있어 중복날 가족들을 거느린 계원 모임의 장소로 정해졌다. 이들은 파렴치하고 비겁했고, 크고 작은 이권에 얽힌 인간관계로 우리사회의 축도판이었다. 이날 모임의 안건은 내년 지방선거 입후보자 계원 선출이었다. 조건은 집행유예가 아닌 자였다. 소설의 막바지 대도시 범죄단체의 진짜 건달들이 바람을 쐬러 냇가에 나왔다. 대형 지프가 정차하면서 날린 모래가 파라솔 아래 음식에 끼얹어졌고 계원과 깡패들간에 시비가 붙었다.
「책」의 당숙은 작은 할머니가 마흔 넘어서 본 막내였다. 나와 동갑으로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동창이었다. 그는 여자대학 도서관 사서로 책에 미친 사람이었다. 월급을 받은 돈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돈만 남기고 모두 책을 샀다. 외국까지 나가 컨테이너로 책을 사들였다. 책이 집안을 넘쳐나 아파트에 지하창고를 지었으나 부족해 이삿짐센터에 맡겼다. 책의 총 수량은 삼만권이었다. 내가 시골에 마련한 집은 별채와 본채 사이에 가로 5미터 세로 6미터의 빈 공간이 생겼다. 이곳을 개조해 당숙의 책을 옮기는 일이 소설의 마지막 에피소드였다.
「천하제일 남가이南可伊」의 성은 태어난 움막이 남쪽에 있었고, 이름 ‘가이’는 ‘개’를 풀어쓴 말이었다. 남의집 머슴살이를 하는 사내가 미친 여자의 거적집을 이따금 찾아왔다. 남가이의 어미는 술집을 다니다가 실연을 해서 미쳤고 남가이를 낳았다. 의무교육으로 초등학교를 마치고 집에서 놀던 남가이는 어느날 태어난 지 십수년 만에 처음으로 끓인 물에 목욕을 하고 세상에 출도했다. 천하제일의 미남으로 성장한 남가이는 주위 모든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마력이 있었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는 여자들을 환장하게 만들었다. 읍내 단오 축제에서 점을 치던 남가이에게 점쟁이 맹인 노인은 재앙을 예고했다. 노인이 남가이에게 돌을 던지자 여자들이 몸을 던져 막았는데 탑을 이루었다. 가장 먼저 남가이의 냄새에 이끌렸던 세 여자가 압사당했다. 군대에 끌려간 남가이는 제대를 앞두고 특수연구실로 보내졌다. 인종개량 기관이었다. 10년만에 어렵게 연구소를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온 남가이는 평범하게 살다가 쉰도 안 된 나이에 죽었다.
「욕탕의 여인들」의 구성은 특이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의 작품명을 소제목을 삼았다. 〈목욕하는 여인들〉1918년 / 〈바느질하는 여인〉1879년 / 〈파라솔을 쓴 소녀〉1883년 / 〈도시에서의 춤〉1883년 / 〈목욕하는 여인〉1888년. 소설은 돈 많은 여성과의 만남으로 다른 세계를 꿈꾸는 남자의 연애사였다. 대학생시절, 영어 과외 중학생 훈의 어머니는 돈 많은 과부였다. 돈많은 집안의 아가씨와 결혼할 기회가 두 번 있었다. 군대를 갔다와 4학년으로 복학했을 때 후배의 소개로 만난 아가씨는 딸만 다섯 있는 유복한 집안의 장녀였다. 자수성가한 장인의 집에 인사드리러 갔다. 느닷없이 쳐들어온 세 딸의 친구들은 대학 후배였다. 술에 취한 그들은 중학생 막내에게 술을 주었고 앰뷸런스가 떴고 파국이 왔다.
가족을 떠나 오래된 도시 ‘안개시市’에 왔다. 한달 쯤 쓸 수 있는 돈으로 하숙을 구했다. 돈은 떨어져가고, 구원을 청하는 그에게 유일하게 답장을 준 고등학교 선배가 소개해 준 여자는 안개시의 유일한 대학의 부설기관 장이었다. 안개시 남녀 통틀어 최고액의 월급을 받는 여자였다. 유서 깊은 도시 안개시에서 그는 그녀에게 각 분야 최고의 식당에서 대접을 받았다. 하숙집에서 훔쳐 나온 스웨덴제 버너를 전당포에 맡긴 돈으로 그는 그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식사대접을 했다. 김치찌개와 소주를 파는 선술집 ‘이방인’이었다. 술에 취한 그녀를 택시에 태웠다. 안개시의 모든 택시운전사가 그녀의 집을 알고 있었다. 담장이 1킬로미터나 되었다. 집에 들어가자는 그녀의 말을 거절하고 그는 걷다가 담장에 기대어 졸면서 밤을 새웠다.
대학을 졸업하고 두어해 늦게 들어간 회사는 계측기기를 생산했다. 자수성가한 아버지를 이은 경영자이자 소유자 사장에게 예쁜 비서가 딸렸다. 창업자 선조의 고택이 있는 바닷가 시골에서 수습딱지를 뗀, 몇 달후 가을맞이 야유회 겸 단합대회 및 창립기념식이 열렸다. 비서와의 우연한 인연으로 둘은 사귀게 되었다. 그는 질시에 눈이 어두워 술이 취해 비서를 단골여관으로 끌고 갔으나 마지막 관문은 항상 통과하지 못했다. 그녀를 포기하고 집안에서 소개해 준 여자와 약혼했다. 오히려 그녀가 안달이 났다. 술이 취한 그녀는 속옷바람 이었으나 전혀 섹시하지 않았다. 그렇게 헤어졌다.
「꽃의 피, 피의 꽃」의 나는 내기를 좋아했다. 게임·판·투기를 막론하고 첫 번째 게임은 무조건 딴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젊은 시절 비구니절의 불목하니 노인을 만났다. 그는 한쪽다리를 심하게 절고 오른손이 없었다. 노인은 대대로 내려온 거만의 재산을 노름으로 탕진했다. 절치부심하고 화투기술을 익혔다. 광산촌 큰판에서 속임수가 걸려 다리가 부러지고 손이 작두에 잘렸다. 수십년이 흘렀고 노인은 도박으로 도를 터득한 경지에 올랐다. 절에서 쫓겨난 나는 채석장 밥집의 고스톱, 전자오락 도박, 서울 최대 규모의 불법전자오락실, 경마장, 제주도 조랑말경주, 미국 서부의 휴양지 니들스의 비디오 포커, 도박의 본거지 라스베거스 보물섬 호텔도박장……을 전전하며 돈을 따고 잃는 에피소드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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