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봄빛

대빈창 2025. 12. 22. 07:30

 

책이름 : 봄빛

지은이 : 정지아

펴낸곳 : 창비

 

『봄빛』은 소설가 정지아(鄭智我, 1965- )의 두 번째 소설집이었다. 나에게 작가는 빨치산 부모의 체험을 소설로 기록한 『빨치산의 딸』(1990)로 각인되었다. 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고욤나무」가 당선되었다. 첫 소설집 『행복』(창비, 2004) 이후 4년 만에 선보인 작품집이었다.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포용하며 웅숭깊은 세계를 지향”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2006년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한 「풍경」을 비롯한 열한편의 단편을 실었다.

「못」의 어미는 건우를 낳고 죽었다. 네 살 때부터 천자문을 줄줄 외던 신동은 다섯 살 되던 해 심한 열병을 앓고 반병신이 되었다. 건우는 새어머니와 이복동생 틈에서 천덕꾸러기로 자랐다. 매형은 총소리로 어지럽던 시절, 산으로 들어갔다. 누이는 건우를 작은집에 맡기고 도시로 떠났고 자운영이 필 때 아침버스로 왔다. 건우는 고아나 다름없던 남의 집 살던 여자를 색시로 들였다. 여자는 백일 갓 지난 어린 것과 철철이 장만해 준 옷가지와 땅문서를 들고 도망쳤다. 건우는 신작로를 바라보며 누이를 기다렸다.

「봄빛」은 나는 군대 다녀와서 대학 졸업하고 괜찮은 직장을 잡았고 여섯 살 많은 여자와 결혼했다. 일제시대 사범대학을 나온 아버지와 한글도 모르는 어머니. 아버지는 국민학교 교사하면서 스무 마지기 논농사와 삼천평 밭농사를 다른 집보다 야무지게 지었다. 나는 월차까지 내고 검사결과를 보러 서울에서 내려왔다. 아버지는 뇌세포가 많이 죽었다는 치매 판정을 받았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병원가는 먼길을 움직인 여든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뒷좌석에서 머리를 맞댄 채 잠드셨다.

「풍경」은 백살을 바라보는 노망 든 할머니와 환갑이 지난 세상과 섞여 본 일이 없는 늙다리 막내아들이 사는 마을에서 십리나 떨어진 산 중턱의 외딴 산집. 그동안 다섯 누이와 세 형이 집을 떠났다. 막내아들은 먹고 자고 농사 짖는 것밖에 몰랐다. 여수 14연대를 따라 입산한 큰형과 작은형, 막내형은 서른 넘어 집나가 행방불명이었다. 노망든 어머니는 책보에 먹을 것을 싸서 어두운 산길로 그를 내몰았다.

「소멸」은 여자의 아비는 도망자였다. 아버지는 죽기 전까지 여자의 가족을 두 달이 멀다하고 이사를 다녔다. 여자는 혼자 있는 순간에야 정면을 응시할 수 있었고 생명의 호흡을 하는 것 같았다. 여자는 한때 젊은 남자와 살림을 차렸으나 다른 존재가 곁에 있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태아처럼 웅크린 채 문 앞에서 자다가 어느날 그 모습 그대로 깨어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삶은 소멸을 준비하는 삶이었다. 여자는 어머니의 고향에서 살던 여덟살 무렵 번개가 친 초여름밤, 엄마를 찾아 길을 나섰다가 어둠 속에서 공포를 극복했다.

「순정」은 술에 취해 잠들었다 늦게 일어난 배강우는 폭설을 뚫고 오거리 식당 과부댁으로 향했다. 그는 서른의 나이에 갓 스물의 아내와 결혼했다. 열일곱살 때 굶주림에서 벗어나려 자원입대했다. 좌익세가 강한 여수 14연대는 제주도 출동 파병을 거부하고 입산했다. 수도사단의 대공세가 있던 그해 겨울, 폭설 속에 능선너머 고향마을 보급투쟁을 나섰다가 탈진상태로 의식을 잃었다. 눈을 뜨자 부모와 경찰 당숙이 눈앞에 있었다. 배강우는 이현상 사령관과 정치지도위원 옥희 누나를 배반했다는 죄책감에 억병으로 술을 마셨다.

「양갱」은 일흔이 넘은 막내고모는 아침부터 모시적삼이 등에 쩍 달라붙도록 팥을 삼고 한천을 고았다. 일곱 아들을 둔 고모는 어디 기댈 때가 없어서 혼자 사는 조카에게 얹혀살고 있었다. 남편은 코코샤넬 항기와 암내 풍기는 여자와 바람이 났다. 어릴 적 귀여워해주는 오빠들 때문에 쥐 풀방구리 드나들 듯 하던 고모댁. 손맛 좋기로 유명했던 고모는 남의 집을 전전했다. 고모가 내민 접시에 담긴 것은 어린 시절 고모집에서 무수히 먹었던 팥양갱이었다.

「스물 셋, 마흔 셋」카페 〈세계의 끝〉에서 만난 영인은 알몸으로 자고 있었다. 스물셋의 우영인은 국문과 4학년 휴학중으로 여행중이었다. 위스키 더블을 얻어마시고 커다란 배낭을 멘채 비틀거리는 영인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어 집으로 데려왔다. 부부로 살아온 십칠년, 아이 둘을 낳았고, 남폄에게 여자가 생겼다. 마흔 셋의 그녀는 휴직하고 영어교사를 위한 어학코스를 떠나왔다. 옆집 노인, 여든 둘의 아일라와 셋은 잔디밭에서 오찬을 가졌다. 포도주에 취해 깜박 잠이 들었고, 발가락의 간지러움에 눈을 떴다. 일주일을 묵었다가 내일 떠난다는 영인이 발가락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막 깨어난 몸이 울부짖었다.

「운명」은 K는 교정에서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일학기 기말고사 기간 공부가 지겨워 영등포역 근처 동시상영관에 갔다가 K를 만났다. 12월 31일 책을 사러 종로에 나갔다가 보신각 주위에서 K와 부딪혔다. K는 운명이라고 반년 넘게 나를 따라다녔다가 군에 갔다. 나는 사회인이 되었고 직장 선배와 2년간 연애하다 청혼을 받았으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김이사의 끈끈한 정복욕을 거절했고 승진에서 두 번이나 누락되었다. 김이사의 부산출장 동행이라는 은밀한 제안, 고속열차에서 만난 K와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호텔의 시트 위 혈흔을 본 K는 감동을 받았다. 나는 K몰래 도망쳐 나왔고 부산에서 유일하게 아는 지명 태종대로 향했다.

「길 1」, 「길 2」의 각 화자話者는 두 명의 광산김씨 38대손 김기영이었다. 병원에 근무하는 김은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었다. 김은 열세살 피난길에서 어머니는 총에 맞아 죽었고, 일곱 살 남동생의 손을 잡고 세 살짜리 여동생을 등에 업고 외삼촌 집을 찾아가야만 했다. 외삼촌 집에는 이미 처가 식구들이 한부대나 피난을 와 있었다. 구박과 학대에 못이겨 집을 나서 한밤중에 대전역에 도착했고 여동생은 죽어있었다. 비싼 털코트를 입은 중년여자에게 남동생을 맡기고, 무임승차로 부산역에 닿았다. 교회에 숨어 들어가 잠을 청했고 양아버지를 만났다. 김은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의사의 가운을 잡고 애원을 하는 어머니를 떠올리며 의사가 되었다. 길을 따라 걷다 깊은 산중에서 만난 김기영은 양아버지가 전쟁통에 잃어버린 아들이었다. 두 김기영은 음력생일과 양력생일이 같은 날이었다. 산중마을 김기영은 골이 좁고 산이 험한 십여호 남짓한 화전마을에서 육십년 넘게 살아왔다. 여덟살 되던해 할아버지가 만들어 준 작은지게를 메고 산에 올랐던 그는, 무수한 샛길을 만들었다.

「세월」은 시집간 첫날밤에 처음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남편은 경찰에 쫓겨 입산했다. 아내는 아기를 낳고 그 길로 산으로 들어갔다. 퍼붓는 폭설 속에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자 포대기에 감싼 갓난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읍내와 지리산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봉산 밑에 자리를 잡았다. 병보석으로 나왔던 남편이 도로 잡혀 들어갔다. 마흔에 들어선 딸내미는 시집을 가더니 이혼하고 돌아왔다. 소설은 치매 걸린 남편 앞에서, 아낙이 한없이 넋두리를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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