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이름 : 수용소군도 2
지은이 : 알렉산드르 솔제니찐
옮긴이 : 김학수
펴낸곳 : 열린책들
볼셰비키 혁명이후 소비에트의 가장 강력한 반체제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찐는 74년 국가반역 혐의로 강제추방 당했다. 반역죄로 몰려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후 독일, 스위스를 거쳐 미국에서 망명생활에 들어갔다. 1990년 16년 만에 러시아 시민권을 회복했고, 4년뒤 고국으로 돌아왔다. 70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로 선정되었으나 수상식장에 참석도 못했다. 그는 사회주의 체제에 현존하는 모순과 비인간성을 고발했고, 20세기 인간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수용소군도』는 지난 100년의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충격적인 민낯을 드러냈다. 전 세계 35개 언어로 번역되어 3천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200명이 넘는 죄수들의 이야기, 기억, 편지를 담은 놀라운 기록문학이었다. 소련에서 자행된 체포와 고문, 왜곡된 재판, 부당한 처형을 고발했다. 부제는 ‘1918-1956 문학적 탐구의 한 실험’이었다. 2권은 제1부 ‘형무소기업’의 후반부 8장~12장, 제2부 ‘영구운동’ 4장으로 구성되었다.
〈즉결 처분〉은 재판제도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체까〉 비상위원회가 있었기에 성행. 인민재판소는 경범죄와 일반 형사사건을 다루었고, 지방재판소와 인민재판소는 시종일관 총살형을 선고할 권한을 보유. 피고인을 처벌하는 기준은, 그를 지금 없애지 않으면 앞으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데에 있는 것.
내전 말기 볼가강 연안지방에 발생한 기근은 부모가 자기 자식을 먹기까지 이른 가공할만한 것. 원인은 생산성의 저하(노동 능력자는 전쟁 참가), 농민의 신뢰 저하, 추수 후에 자기 몫이 없는 농민의 절망에 기인한 것. 전 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의 회의는 5월 하순에 형법전을 채택, 형법을 1922년 6월 1일부터 시행하기로 결의.
소비에뜨 러시아는 지식인(낡은 부르주아 지식계급)을 제거·추방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 국외추방은 오히려 망명자에게 〈선물〉이었으므로 〈총살〉과 〈수용소군도 유배〉 두 가지 중 하나를 적용. 신경제정책NEP은 파렴치한 기만으로 비현실적인 공업 발전 기획들이 쏟아졌고, 불가능한 계획과 업무가 공표. 1920년대 많은 최면술사들은 GPU에서 근무, 1930년대 NKVP 산하에 최면술사 양성 특수학교 설립.
혁명은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도록 모든 명칭을 바꾸었고, 〈사형〉도 〈최고 조치〉로 개정, 〈형벌〉이 아니라 〈사회 방위〉의 수단. 1939-40년 두 해에 걸쳐 전 소비에뜨 연방에서 50만 명의 정치범과 48만 명의 상습절도범을 총살. 단식 투쟁을 하다 죽은 사람에 대하여 형무소 당국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1937년 중순에 하달된 지시.
죄수를 호송하는 스똘리삔 차량은 제일 위쪽 선반에 2명은 웅크리고 앉고, 5명은 중간 선반에 눕고, 아래에 13명이 쪼그리고 앉았다. 그곳은 몸을 움직일 틈이 없었고, 사람들 위아래에 짐까지 놓여 위와 옆으로 짓눌린 채 다리를 꼬며 며칠 밤을 보내야만 했다. 식사는 소금에 절인 청어와 빵 한조각이었지만 배급량 5백그램에 2백그램만 배급. 나머지는 호송대가 착복해 자기 물건을 팔아 사먹어야 했다. 호송차(까마귀)에서 형사범(도적들)은 정치범들의 가방에서 제일 좋은 것들을 빼앗았다.
3~5곳의 중계형무소를 거치지 않은 죄수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죄수는 10곳을 다 기억하고, 50곳까지도 셀 수 있었다. 이바노보 중계형무소는 겨울에 불을 때지않아 죄수들은 꽁꽁 얼었고 맨 위 나무 침상에 있던 사람들은 발가벗은 채 누웠다. 죄수들이 질식하지 않게 방문의 유리를 모두 부쉈다. 20명 수용인원의 21호 감방에 323명을 처넣었다. 판자 침상 밑에 물이 괴어 있어 죄수들은 물에 잠긴 판자에 누워있어야만 했다.
깨진 창문은 살을 에는 찬바람이 휘몰아쳤고 판자 밑은 북극의 밤과 다름없었다. 빛은 한줄기도 없었다. 수감자가 너무 많아 석달 동안 목욕도 못했다. 이가 들끊고 다리에 종기가 생기고 티푸스가 만연했다. 전염병으로 교통이 차단되어 넉달 동안 죄수 이동이 없었다.
〈붉은 수송 열차〉는 수용소 관리본부의 고위 장군이 서명한 특별명령에 따라 운행. 죄수들을 〈붉은 수송 열차〉에 실을 때는 언제나 야간을 이용. 가축수송 차량에 몸을 실은 죄수들은 추위와 굶주림, 희망과 공포, 무뢰한과 호송병의 틈새에 끼어 이중의 시달림을 받았다. 1935년 레닌그라드에서 불라지보스또끄까지 가는데 호송 열차는 넉달의 시일이 소요. 협궤철도 무개화차에 실린 죄수들은 나란히 누웠고 커다란 방수포를 씌웠다.
적화 용량이 엄청난 화물선들이 죄수들을 불모의 땅 북극권으로 실어 날랐다. 죄수들은 3층 선실에 머리와 발치를 엇갈려 두 줄로 누웠다. 변기로 가려면 사람의 몸을 밟지 않고 갈 수가 없었다. 1938년에 부녀자들로 이루어진 호송단은 하루에 25킬로미터를 걸었고, 한두 마리의 군견을 끌고 가면서 뒤떨어지는 죄수들을 총개머리판으로 몰아세웠다.
인사카드의 중요한 칸은 〈특기란〉으로 솔제니찐은 핵물리학자라고 썼다. 천국과 같은 수용소(죄수 속어로 샤라시까)에서 형기를 반쯤 보내고나서 들어갔다. 살아남은 것은 그 덕택이었다. 그곳은 깨끗하고 따뜻했으며 정신적인 노동과 극비의 일을 수행했다. 소비에뜨 연방에 깔려있는 수용소에는 1천2백만명까지 있었는데, 그들의 반수 가량이 정치범들로 스웨덴이나 그리스 같은 작은 나라의 인구와 맞먹었다.
2권의 한국인에 대한 언급은 한번 나왔다. ‘블라지보스또끄 중계형무소에는 1937년 2월에 4만명 가량의 죄수들이 있었다. 거기에는 한국인들만 있는 구역이 있었는데 모두 이질로 죽고 말았다. 마지막 한사람까지’(3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