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굴뚝의 기사

대빈창 2026. 4. 17. 07:00

 

책이름 : 굴뚝의 기사

지은이 : 서대경

펴낸곳 : 현대문학

 

나는 활자중독자였다. 얼마나 다행인가. 내 앞에 한정없이 늘어진 시간을 소비할 수 있는 무기를 손에 쥐었다. 3주 만에 병원에서 퇴원했다. 주일에 한번 통원치료를 가야했다. 군립도서관에 가기까지 7일간의 공백, 손에 읽을거리가 없었다. 퇴원날짜에 맞춰 온라인서적에 두 권의 책을 주문했다. 반갑기 그지없는 9년 만에 출간된 전성태의 소설집과 서대경의 시집이었다.

 

어느 가을밤 나는 술집 화장실에서 원숭이를 토했다 차디찬 두 개의 손이 내 안에서 내 입을 벌렸고 그것은 곧 타일 바닥에 무거운 소리를 내며 떨어져내렸다 그것은 형광등 불빛을 받아 검게 번들거렸고 세면대 아래 배수관 기둥을 붙잡더니 거울이 부착된 벽면 위로 재빠르게 기어올라갔다 나는 술 깬 눈으로 온몸이 짧은 잿빛 털로 뒤덮이고 피처럼 붉은 눈을 가진 그 작은 짐승의 겁먹은 표정을 바라보았다 나는 외투 속에 원숭이를 품었다 그것은 꼬리를 감고 외투 속주머니 안에 얼굴을 파묻은 채 가늘게 몸을 떨었다

 

내 안에서 토해져 나온 원숭이를 그린 「가을밤」의 1연이다. 이 한편의 시가 나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었다. 시인 서대경(1976- )은 2004년 『시와 세계』로 문단에 나왔고, 8년 만에 첫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는 출간했다. 11년 만에 선보인 두 번째 시집 『굴뚝의 기사』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마흔일곱번째 시집이었다.

자본주의 도시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체불명의 ‘나’를 묘사한 32편의 시와 시인의 에세이 한 편이 실렸다. 시편에는 황량한 잿빛 도시속의 기이한 존재들이 만나 꿈과 현실을 오가는 몽환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굴뚝의 기사, 도시가 자신의 꿈속 세계라고 믿는 요나, 박쥐의 피는 빠는 흡혈귀 소설가, 담배 피우는 원숭이, 고아원 출신 소매치기, 잠속에 빠져있는 헌책방 주인, 시인 서대경 등 다양한 화자가 등장했다.

첫시 「원숭이와 나」에서 원숭이는 시인과 담배를 같이 피우고, 마지막시 「케이블카」에서 시인과 원숭이는 끝없이 변하는 도시의 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인은 말했다. “‘죽음이 가장 격렬해지고 삶이 가장 명확해지는 순간으로 다가가는 여기’에 시가, 우리가”가 있다고. 눈길을 끄는 표지그림은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개념미술의 선구자 마이클 크레이그-마틴(1941- )의 〈Untitled〉(2022)이었다. 같은 제목의 「굴뚝의 기사」가 3편, 「요나」가 2편이었다. 마지막 「굴뚝의 기사」(122쪽)의 전문이다.

 

굴뚝에서 내려와, 꼬마야. 나와 함께 걷자. 하늘에는 구름의 웃음. 하늘에는 무無. 굽이치는 무. 흔들리는 잎사귀들. 미지근한 빗방울의 감촉. 기차의 지나감. 내 웃음의 지나감. 내려와 꼬마야. 하늘과 뒤섞이자. 나의 투구를 너에게 줄게. 나의 당나귀를 줄게. 하늘에는 영원. 나부끼는 바람의 길들. 나와 함께 걷자. 네 죽음은 거기 두고. 벚꽃 채찍을 줄게. 빗방울 박차를 줄게.

 

p.s 2025. 12. 중순에 긁적이고, 2026. 4. 중순에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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