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이름 : 초저녁
지은이 : 하종오
펴낸곳 : 도서출판 b
보름 만에 시집을 다시 대여했다. 마음이 흔들렸고 따라서 활자도 흔들렸다. 어머니 요양원 입소, 무릎 반월연골판 봉합 재수술 입원으로 보름이 흘러갔다. 책을 독서대에 올려놓았으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에서 벗어나 섬으로 돌아오면서 군립도서관에 들렀다. 읽지도 못하고 반납한 책들을 그대로 대여했다. 어머니가 요양원에 입소하신지 한 달이 지났다. 나의 왼발 무릎에 아직 보조기가 채워져 있다.
『초저녁』은 197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고유의 리얼리즘을 구축한 하종오(河鍾五, 1954- )시인의 스물여덟번째 시집이었다. 환갑을 맞은 시인이 시력詩歷 40여년을 맞아 펴낸 시집이었다. 초로에 접어든 시인이 그윽한 눈길로 저간의 삶의 이모저모를 되돌아보는 시편들을 모았다.
시집은 5부에 나뉘어 67편이 실렸다. 1부는 시간의 구분과 연결을 주제로 한 시편. 2부는 시에 대한 시, 메타 시meta poetry. 3부는 민족-국가들간의 국경, 국경을 넘나드는 인간의 문제. 4부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사유. 5부는 도시 변두리에서 자식을 기르고 떠나보내는 삶을 풀어 낸 산문시. 문학평론가 홍승진은 해설 「비정함 속 구분과 연결의 시학」에서 시편은 “언뜻 서정적 성격이 강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서사적 성격을 풍부하게 담고 있는 것”(139쪽)으로 다가온다고 말했다.
시인은 말했다. “40년간 써온 시를 정리하자면 서정시와 리얼리즘 두 갈래다. 이 시집에는 강화도 농촌과 도시 변두리의 서정을 담은 시, 그리고 탈분단·다문화 문제를 다룬 리얼리즘 시를 모았다. 한번 매듭을 짓자는 뜻이다.” 마지막은 「반성」(58-59쪽)의 전문이다.
지구상에만 사는 자본주의자들은 / 기계를 다량으로 만들고 / 농작물을 다량으로 만들고 / 생필품을 다량으로 만든다 / 행위만으로 본다면 / 시의 다작도 자본주의적, / 다작하는 나는 자본주의자, / 비자본주의적인 시를 / 자본주의화해 버리는 나의 행위를 / 열정이라는 말로 설명해 보려 하지만 / 시인이 자본주의자가 된다는 건 / 시인이기를 포기하는 욕망일 것이다 / 지구상에만 사는 자본주의자들이 만들어낸 / 수없는 기계 중에서 날마다 둘 이상 작동하고 / 수없는 농작물 중에서 날마다 둘 이상 먹어치우고 / 수없는 생필품 중에서 날마다 둘 이상 사용하는 / 자본주의에서 시를 과작할 순 없지, 내가 / 시인이니 내면적으론 비자본주의자라고 해도 / 외면적으로 그 짓들 하며 시를 쓰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