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퇴곡리 반딧불이
지은이 : 유소림
펴낸곳 : 녹색평론사
퇴곡리는 강원도 강릉의 궁벽한 산촌으로 시인의 엄마와 아버지가 말년을 보낸 곳이다. 고작해야 주민이 고작 네 명뿐인 작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산골마을이다. 맑스주의자 아버지와 순종적인 일본인 엄마는 다섯명의 딸을 두었는데 시인은 막내다. 지은이는 언니들과 나이 터울이 커 ‘꼬마’로 불렸다. 고난에 찬 이 땅의 현대사에서 좌파 지식인이었던 아버지를 둔 가족의 삶은 필연적으로 가시밭길이었다. 5·16 군사쿠데타로 아버지는 10년 간 잠수 생활을 하고, 서대문구치소에서 영어의 몸이 된다. 그때 나이어린 시인은 중학생으로 군홧발 정권의 서슬퍼런 감시망을 피해 도망 다니던 아버지와 1년간 삶을 함께 했다. 1부 ‘퇴곡리 듬바위골 분교’에 실린 14편의 글은 도시 생활을 접고, 퇴곡리 산골 생활을 하면서 몸으로 받아들인 자연예찬이고, 2부 ‘엄마의 수선화’ 8편의 글은 돌아가신 엄마와 아버지에 대한 어려웠던 시절의 눈물겨운 회상글이다. 그리고 3부 ‘저 들녘 벼이삭’의 21 편의 짧은 글들은 변두리 도시의 아파트 생활을 하며 전철로 아수라장 서울로 출퇴근하면서도 자연적 삶에 대한 동경과 사랑을 읊었고, 마지막 4부는 ,캄보디아 여행기‘로 베트남의 구찌 터널과 크메르의 앙코르와트를 여행하면서 느낀 두 나라의 비극적 현대사에 마음 아파하는 글로 이 책의 마무리를 삼았다.
시인은 산골 퇴곡리에서 뱀을 길들이고, 머위 쌈과 줄기 껍질을 벗겨 나물을 해 먹으면서 반딧불이가 사라지고 막돌로 아름다운 돌담을 쌓고, 뒤뜰에 말없이 불쏘시개를 쌓아놓는 마음이 사라진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나는 주문도에 정착하면서 머위를 곁에 두고 쌈과 나물을 즐기게 되었다. ‘밭을 망칠려면 머위를 심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머위의 번식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2년 전 봄, 나는 머위 두서너 뿌리를 얻어 밭에서 마당으로 올라오는 계단 옆 황토가 시뻘겋게 드러난 경사면에 심었다. 터가 비좁다는 듯 지금은 나무계단 틈과 석축 틈새까지 침범해 넓은 잎사귀를 바람결에 흔들고 있다. 어린 머위 잎을 쌈 먹으면 쌉싸레한 맛이 그럴듯하다. 또한 병어찜에 머위 줄기를 얹으면 그 사각거리는 맛이 일품이다.
시인은 캄보디아 여행을 하면서 한국의 졸부들이 ‘땀 흘려 일하는 것을 우습게 여기는 풍조를 동남아에 퍼뜨리는’ 천민근성을 부끄러워했다. 아마! 나는 더 이상 해외여행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삶에 있어 유일했던 8년 전의 태국 배낭여행에서 겪었던 일화를 여기 소개한다. - 그때 나의 눈길에 기둥에 매달린 한글로 적힌 경고문구가 뜨였다. 『음식 남기시면 Ø500 추가로 내셔야 합니다!』『소주 반입금지』 갑자기 썰렁한 홀에 고함이 난무했다.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한 가족으로 보이는 중국인들이 술에 취해 난장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 꼴을 바라보는 태국 종업원들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일본인들의 관광지는 이제 동남아를 벗어나 괌이나 하와이로 향한다고 한다. 그 틈을 우리 한국인들이 메꾸었고, 이제는 점차 그 자리도 중국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경제성장에 따른 극동 3국의 동남아 관광지에서의 추태. 저열한 자기과시욕의 악순환이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가이드에게 얻어들은 한국인의 추태를 덧붙여야겠다. 몇 년 전 바로 이 식당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그 국제적 개망신은 한국인들이 고국에서 가져 온 소주를 식당에서 먹은 데서 비롯되었다. 식당의 규칙은 반입한 술을 마실 경우 Ø1,000바트를 벌금으로 내야한다. 막무가내로 주인장과 싸우다가, 궁지에 몰린 그들은 Ø1,000바트를 물고는, 이제 벌금을 물었으니 아예 공개적으로 먹겠다고 술병을 들고 추태를 부리다 강제 추방당했다. 얼굴이 벌게진다. 씁쓸하다. 그런데 이들이 한국의 졸부들일까. 아니다. 한국에서는 평범한 우리들의 이웃일 것이다. -
'책을 되새김질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꿈의 도시 꾸리찌바 (0) | 2011.09.22 |
---|---|
칼 회고전 (0) | 2011.09.19 |
현대 고고학 강의 (0) | 2011.09.07 |
북치는 소년 (0) | 2011.09.05 |
거꾸로 보는 고대사 (0) | 2011.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