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칼 회고전

대빈창 2011. 9. 19. 05:52

 

 

책이름 : 칼 회고전

지은이 : 김희업

펴낸곳 : 천년의시작

 

어떤 물고기도 낳지 못할 바에는/불을 피우지 그래/무더운 날은/활활 타오르는 가슴이라도 후벼파야지/들춰진 치맛자락에서/서투른 방생을 보았지/이젠 갈라진 혓바닥으로 무슨 말을 하나/비야, 제발 부탁인데/치욕 그만 덮어줄 수 없겠니

 

‘마른 연못’(68쪽)의 전문이다. 작년 나는 이 시를 발견했다. 아니 시를 쓴 시인의 이름 석자가 안경렌즈에 달라붙었다. 발행된 지 1년여가 훨씬 지난 구문(舊聞)이었다. 밀고 미루다가 일이 코앞에 닥쳐서야 어쩔 수 없이 본도에 나가 일을 처리하고, 하루 두 번밖에 없는 카페리호 오후 배에 올랐는데 철지난 한겨레신문이 눈에 뜨였다. 문자깨나 깨우쳤다는 섬 촌로들은 조중동을 끼고 살았다. 찌라시라 백안시하는 나는 눈길도 주질 않는다. 섬에 정착하면서 한겨레를 정기구독 했으나, 몇 달 못가 그만두었다. 섬 사정상 배를 타고 우편으로 배달되는 신문은 석간이 되었고, 더군다나 주말신문은 월요일에 받아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누군가 읍내에서 구입한 물건을 포장한 신문지였을 것이 분명했다. 이 글을 쓰면서 검색해보니 2009. 11. 19일자 신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올 봄 시집을 구입하고, 30여년 저쪽의 시인을 떠올렸다. 시인은 198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고, 10여년만인 2009년에야 첫 시집을 펴냈다. 첫 시집인 ‘칼 회고전’은 시인에게 2010년 제6회 사계 김장생 문학상 대상을 안겨주었다. 시집에는 56편의 시가 4부에 14편씩 나뉘어 실렸다. 연작시 ‘억압의 역사’는 5편인데 거미, 새, 돌, 물고기, 쥐를 빌려 억압된 일상을 변주시켰다.

 

흰옷 입은 사내가/달콤한 잠옷을 내게 건네 주었어/그걸 채 입기도 전에 나를 잃어버리고 말았어(1연)

( - - - - - - )

회복실의 불빛, 내 몸 훑어/차례차례 잠의 옷을 벗기고 있었어/거기 또 다른 내가 있었어(3연)

 

당장 내게 들이대더라도/두렵지 않을 것 같다/이미 오래전 칼이 내 몸을 두 차례 다녀갔기 때문/처음엔 낯선 방문자로 다가와 불쾌하게 굴던 칼,

 

'전신마취‘의 1연과 3연이고, 표제시 ’칼 회고전‘의 도입부다. 어릴 적 벼베기가 끝난 마을 앞 콘크리트 수로에 나갔다가, 지금도 머리털이 곤두서는 섬찟함에 몸이 부르르 떨리는 일을 겪었다. 갈수기라 물이 말라 졸졸 흐르는 농로의 수문에 작은 깡통이 떨어져있었다. 무심결에 어린 나는 뚜껑을 열고, 안에 든 물감을 손에 발랐다. 학교에 다니던 형들의 수채화 물감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물감은 유성 페인트였다. 아무리 물로 씻어내도 미끈거리기만 했다. 당황한 나는 생철 조각으로 손에 묻은 페인트를 벗겨냈다. 한순간 생철 조각은 여린 살을 깊게 파먹었다.

시인의 첫 인상은 칼과 마주친 것처럼 섬뜻하다. 이제야 알겠다. 시인은 전신마취를 두 번 이나 당하는 큰 수술을 겪었던 것이다. 그 깊은 수술 흔적이 얼굴에 고스란히 남았다. 시집에는 고통과 좌절의 흔적이 역력하다. 25년전 캠퍼스에서의 우연한 마주침. 이후 선배를 통해, 시인이 본격적인 시 공부를 위해 학업을 계속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서해의 조그만 섬을 운항하는 배 안에서 김. 희. 업. 이름 석자를 발견하고, 이렇게 시집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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