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중세의 가을

대빈창 2026. 6. 2. 07:00

 

책이름 : 중세의 가을

지은이 : 요한 하위징아

옮긴이 : 이종인

펴낸곳 : 연암서가

 

디아스포라 지식인 故 서경식(徐京植, 1951-2023) 선생의 ‘국경과 국민주의 너머를 상상’한 에세이집 『어둠에 새기는 빛』에서 책을 다시 만났다. 776쪽 양장본의 두꺼운 부피,  대여목록에 있던 책을 자꾸 뒤로 미루었다. 책은 1919년에 처음 나왔다. 내가 잡은 책은 출판사 《연암서가》의 초판 4쇄로 2014. 4.에 출간되었다. 표지그림은 장 푸케의 〈성스테파누스와 함께 있는 에티엔 슈발리에〉 가벨데갈레리 국립박물관. 베를린이었다.

네덜란드 역사학자·미술사가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1945)는 모든 문화 현상의 기원을 ‘놀이’에 두고 인간의 존재와 행위 양식의 본질을 파헤친 기념비적 저서 『호모 루덴스Homd Ludens』로 우리에게 낯익었다. 책 말미의 〈용어․인명 풀이〉부터 읽어 나갔다. 가짜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s부터 헨리 6세Heenry Ⅵ(1421-1471)까지 100개가 실렸다.

흔히 우리는 중세를 ‘암흑시대’로 알고 있었다. 이탈리아 고전학자 페트라르카가 처음 사용한 말로, 중세 천년을 통칭하여 경멸적인 뜻이 담겼다. 중세 Middle Ages는 서로마제국(466)의 멸망에서 근대사가 시작되는 시점(대략 1500년까지)의 기간을 가리켰다. 하위징아의 역사관은 중세 끝 무렵의 문화를, ‘와야 할 것’으로 르네상스의 전사前史가 아닌 중세문화의 종말로 파악했다.

하위징아는 네덜란드판 서문에서 “중세 후기(14-15세기)는 나무로 친다면 열매가 농익어서 완전히 만개하고, 또 땅에 막 떨어지려는 그런 시대이다.”(4쪽)라고 말했다. '가을'대신 프랑스어 번역판은 쇠퇴declin, 영어판 번역은 조락waning이 쓰였다. 19세기 들어서서 낭만주의자들은 중세를 영광스러운 과거로 재평가하고, 예술사가들은 예술적 성취를 칭찬했다. 중세는 유럽 문화의 여러 제도가 형성된 시대, 대학 설립, 도시와 근대의 의회정부 탄생, 근대 문명의 도덕적․윤리적 틀이 잡힌 시대였다.

『중세의 가을』은 서유럽의 14세기와 15세기를 중세 정신의 마지막 만개, 쇠퇴로서의 고딕 문화의 전개로 보았다. 하위징아는 유물遺物적 사료뿐만 아니라 연대기․각서․서한․송사頌辭와 더불어 서술사료․시가․이야기․소설 등 문학작품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자료를 검토하여 그 안에 담긴 시대정신의 형식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중세의 낯선 나라 ‘부르고뉴 공국’은 오늘날 유럽 북부 저지대와 북프랑스 일부를 포함한 역사적 구성체로 중세 대부분 기간 동안 유럽 종교문화와 학예의 찬란한 중심지였다.

‘삶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태도에서 커다란 분수령이 있다면, 중세나 르네상스의 간극보다는 르네상스와 근대의 간극이 더 깊고 크다고 보아야 한다. 대체로 보아 예술과 인생이 서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하나의 방향전환이 이루어진다.’(95쪽) 전반부 제1장에서 8장까지는 중세 후기의 생활을 이야기했고, 후반부 9장에서 14장까지는 인생과 예술, 말과 그림, 형식과 내용을 다루었다.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나의 결혼〉 내셔널갤러리, 영국. 반가웠다. 하위징아는 반 에이크 형제의 극명하게 묘사한 리얼리즘을 근대의 전령이 아닌, 중세의 광휘가 마지막으로 빛을 발한 국면으로 보았다.

15세기의 이탈리아 문화생활의 기초는 여전히 중세적인 사상에 머물러 있었다. 소수의 프랑스 사람들이 인문주의 형식을 받아들였지만, 다수는 아직 르네상스를 대대적으로 환영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들의 정서와 방향 감각은 여전히 중세적이었다. 중세의 알레고리와 르네상스의 신화 사이에는 사실상 본질적인 차이가 없었다. 신화 속의 신들은 중세의 상당한 기간동안 자유로운 은유를 동반했고, 비너스는 순수한 중세시中世詩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 자유로운 알레고리는 16세기까지, 심지어 그 뒤의 훨씬 훗날까지 성행했다.

'책을 되새김질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입국자들  (1) 2026.05.29
책을 덮고 삶을 열다  (1) 2026.05.28
작약과 공터  (0) 2026.05.27
나무 위의 남작  (0) 2026.05.22
이탈로 칼비노의 문학 강의  (0) 2026.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