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크나큰 침묵

대빈창 2011. 11. 3. 06:00

 

 

책이름 : 크나큰 침묵

지은이 : 유용주

펴낸곳 : 솔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를 뒤늦게 읽고, 시인의 시집과 산문집을 주문했다. 그런데 이 시집만 나의 손에 들어왔고, 나머지 책들은 품절이었다. 어릴 적 아껴둔 조청을 놋숟가락으로 야금야금 핥아먹듯이 15년 전에 출간된 시집을 천천히 읽어나가다, 이 시편을 만났다. 돌연 나의 기억은 30여년 전으로 빠르게 리와인드 되었다.

 

그 노인/73 망통 그 노인/자전거 타고 내려오다 후배 차에 부딪힌 그 노인/철지난 양복에 살색 털조끼를 걸친 그 노인/까맣게 때 낀 와이셔츠에 주홍색 올가미를 매달고 있던 그 노인/바지 지퍼가 3분의 1쯤 열려 있던 그 노인/민자당 당원증을 주민등록증보다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그 노인/진단도 나오지 않은 그 노인/주사 두 대 맞고 방사선과에서 사진 여섯 장 찍은 그 노인/찢어진 눈만큼 다친 무릎에 소독약 안 발라준다고 큰소리친 그 노인/아들딸이 들이닥치자 더 쩔룩거리던 그 노인/치료 대기 중에 30분이나 똥을 싼 그 노인/목이 탄다고 식혜 한 통을 단숨에 마신 그 노인/통원 치료하라는 담당의사에게 입원시켜달라고 애원하던 그 노인/금방 허리 아파 죽겠다던 그 노인/현장 검증 나가자고 말하자 벌떡 일어나 걸어 나가던 그 노인/20년 넘게 대방동 한 귀퉁이 복덕방에 나가/밥 빨아먹고 있는 늙은 거머리, 그 노인

 

‘거머리(43 ~ 44쪽)’의 전문이다. ‘민자당 당원증’. 81년도 겨울이었다.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한 나는 젊은 혈기를 알코올에 기대 세상에 분풀이를 하고 있었다. 구정 전날이었다. 어머니는 방앗간에서 가래떡을 뽑아 리어카에 싣고 해짧은 겨울 어스름 아스팔트를 걸어오고 계셨다. 나는 그 순간에도 부랄친구들과 두꺼비를 까고 있었다. 덤프트럭이 리어카를 뒤에서 치고 나가면서 뺑소니를 쳤다. 다행히 뒤에 오던 차가 길가에 쓰러지신 어머니를 발견하고 읍내 의원에 모셨다. 허벅지를 크게 다치신 어머니는 수술을 위해 인천 부평의 가톨릭 병원으로 옮기셨다. 어머니는 천주교 신자였다. 하릴없던 나는 집과 병원을 오가면서 어머니를 병간호했다. 수술경과가 좋아 한달여 만에 어머니는 퇴원하게 되셨다. 원무과에서 퇴원수속을 밟는데, 앞의 중년남성이 계산을 치르면서 군제대증과 같은 작은 수첩을 내밀었다. 지금도 선명하다. 그러자 여사무원이 파란 스템프를 꽝! 찍어주는 것이 아닌가. ‘30% 감액’. 그 증은 ‘민정당원증’이었다.

이 시집은 3부로 나뉘어 모두 58편의 시가 실렸다. 표제는 ‘구절리 가는 길(36쪽)’의 한 구절을 따왔다. 2부의 20편은 모두 산문시다. 시편을 읽어 나가다 56 ~ 57쪽의 ‘오돌개’의 ‘서리’ 릴레이를 접하면서 나는 ‘히히 흐흐 후후’혼자 웃음을 짓는다. 포도서리는 절대 가위가 필요하다. 포도꼭지를 손으로 꺽는 요령은 아무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욕심내서 많은 양을 서리하면 안 된다. 이동하면서 자루 밑의 포도는 으깨져 아깝기만 하다. 딸기서리는 낮에 한다. 밤 서리는 색깔 구분을 할 수 없어 모조리 딸 수밖에 없다. 십중팔구 며칠 뒤 딸기밭은 채마밭으로 변해 있기 마련이다. 가장 스릴 넘치는 서리는 토끼서리다. 나는 아직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토끼고기는 약간 질기면서도 담백하고 기름끼가 많다. ‘집 비운 사이(82쪽)’는 가난한 셋방살이를 턴 좀도둑에게 보내는 편지글이고, ‘이거야’, ‘療法’, ‘高麗葬· 1’, ‘高麗葬· 2’는 군 교도소의 경험이 형상화된 시편으로 시인의 최근 자전적 장편소설 ‘어느 잡범에 대한 수사보고’의 모티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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