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고흐보다 소중한 우리미술가 33
지은이 : 임두빈
펴낸곳 : 가람기획
곽훈/김창열/김승연/황규백/이일호/이대원/박서보/송수남/김구림/이건용/이두식/강대철/전뢰진/홍석창/이왈종/유휴열/원문자/심재현/최만린/함섭/서승원/김태호/이승일/이석주/김용철/조영자/임철순/임영길/강상중/박승규/박영율/유의랑/박장년. 이 책에 등장하는 한국미술가 33인이다. 여기서 이대원은 2005년, 박승규는 2007년에 타계했다. 그리고 모두는 현재 생존하는 우리나라 화가들이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 미술계에서 작가 정신과 예술적 표현력이 뛰어난 대가와 중진급 화가 33인의 예술세계를 재조명했다고 한다. 차례를 훑어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런대로 무난하게 책을 고른 것 같다고. 그것은 물방울 그림의 김창열, 한국미술의 초창기 전위화가 박서보, 군부독재를 정면으로 비판한 조각가 강대철, 그리고 시인친구 함민복의 첫 번째 산문집 ‘눈물은 왜 짠가’의 표지그림의 화가 이왈종 4명이 고작이었기 때문이었다. 표지 그림은 황규백의 '바가지(62쪽)'다.
내가 처음 손에 잡은 미술관련 책은 ‘94년에 발간된 시인 조정권의 예술기행산문집 ‘하늘에 닿는 손길’이었다. 이후 우리 옛 그림, 현대 한국화, 서양고미술, 서양현대미술, 미술이론과 미술사 등 지적 충족욕에 따른 흥미가 배가되면서 나의 책장에는 미술관련 서적이 수십 권이 쌓였다. 학창시절 중동무이된 화가 꿈의 좌절에 대한 보상심리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나의 독서경향은 현대 한국미술에 있어 민중미술로의 경도였다. 눈을 씻고 봐도 예외적인 내용을 담은 책은 두서너 권이 전부였다. 그때 이 책이 눈에 뜨였다. 자칭 ‘생태적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나로서는 표제가 거슬렸다. 3·1 민족운동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33인이 연상되었고, 우리 미술가는 당연히 고흐보다 소중하다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불순한 의도가 담긴 민족주의적 미술사관을 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역시나 였다. ‘수많은 노동자들은 돈 몇 푼을 더 받으려고 걸핏하면 파업을 하고 데모를 하며 도시 기능을 마비시키지만, 화가들은 어느 누구도 가난 때문에 데모를 하지는 않는다.(295쪽)' 이 책에 등장하는 화가들은 대부분 지은이처럼 대학교수이거나, 정년퇴직을 하고 한적한 전원생활을 만끽하며 예술을 즐기며 노후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저열한 지식인의 특권의식을 내세우는 저자의 세계관이 짙게 드리운 이 책은 솔직히 읽기가 불편하다 못해 고약하다. 노동자들도 당연히 미술을 감상하고 즐길 권리가 있다. 비정규직이 80%를 차지하고, OECD 국가 중 최장의 노동시간과 최고의 산재율을 자랑하는 이 땅의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를 대하는 저자의 시선은 시대착오적이다. 저자는 이 땅의 부패한 미술계에 비분강개하며 미술교수의 90%가 바뀌어야 한다고 흥분하지만, 나는 상속수단으로서 고가의 미술품을 비자금으로 사들이는 삼성문화재단의 행태에 분노한다. 프랭크 스텔라의 ’베들레햄 병원‘과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은 수백억원대를 호가한다. 또한 현등사삼층석탑 사리탑, 국보 138호 금관, 국보 213호 금동대탑 등 도굴품을 사들여 소장하고도 뻔뻔스럽게 얼굴을 들이미는 ’삼성의 대한민국‘이라는 무소불위의 현실에 울화가 치민다.
저자는 ‘조각가 김복진을 터무니없이 과대포장하곤 하는데, 진실을 말한다면 그의 조각수준은 오늘날 대학생의 습작수준이다’(194쪽) 이라는 망언도 서슴치 않는다. 김복진은 1940년 39살로 요절한 이 땅의 첫 번째 현대 조각가다. 토월회, 파스큘라, 카프 등 초창기 현대 예술을 주도했던 단체의 중심인물로 그를 빼놓고 20세기 전반기 한국 예술사를 논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저자의 편협한 재단은 그가 ‘조선공산당원’이었다는 사상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만 마쳐야겠다. 나의 독서에 있어 내 손으로 선택한 가장 크게 잘못 집은 책 중의 한권이었다. 여과없이 자기과시욕이 드러난 글귀마다 표시한 북다트가 20개가 넘었다. 현대미술가 33인에 대한 예술적 재조명은 고사하고, 나의 눈에는 자신의 미술평을 내세우는 독선적 편협이 횡행하는 글 모음집으로 보였다.
인간을 물화시키는 현대의 심각한 비인간화의 상황에서 생명가치의 회복이라는 목적을 지니고 출범한 예술운동 '범생명적 초월주의'를 주창하는 저자이지만 나는 가자미 눈을 뜰수밖에 없다. 현실 모순에 대한 진정한 성찰이 밑바탕이 되었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덧붙이면 편집의 불성실성이다. 독자를 배려하는 글흐름과 연계된 도판의 배치보다는, 행간에는 저자의 분노와 울분만이 공허하게 메아리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