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진중권의 Imagine
지은이 : 진중권
펴낸곳 : 씨네 21 북스
겨울 아침 햇살은 힘이 없었다. 우중충한 회색 구름떼에 낮게 짖눌려 신음하는 것처럼 보였다. 조조 상영은 놓치고 서너명의 일행은 오전의 2차 상영에 눈길을 모았다. 지겹기만 한 대한 뉴스가 더디게 흘러갔다. 근육질의 주인공이 적진 침투를 위해 아파치 헬기에서 몸을 날렸다. 낙하산을 펼치려고 했으나, 연결끈이 프로펠러에 말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주인공은 톱니 날이 두드러진 단검으로 생명줄인 낙하산 끈을 끊었다. 고공 3,000m 상공이었다. 스크린은 바뀌어 밀림에 짙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웃통을 벗어젖힌 주인공이 관객을 향해 뛰어왔다. 동굴에 숨어 든 주인공은 찢어진 이두박근을 스스로 꿰맸다. 일행은 감동에 겨워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었다. 영화가 끝나자 누구랄 것도 없이 일제히 일어선 그들은 기립박수를 쳤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입장료가 아까운 그들은 휴식시간을 극장 안에서 버티고, 다시 지겨운 대한 뉴스를 기다렸다. 두 번째 영화 관람이 끝나고, 극장 문을 나서자 해짧은 겨울해가 서산에 넘어가고 있었다. 근육질 주인공은 실베스터 스텔론. 밀림은 아프카니스탄. 영화는 바로 ‘람보 Ⅱ’였다. 80년대 중반 지방 소도시의 개봉관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점심을 빵으로 간단히 때우고 연속해서 두 번이나 관람한 엄청나게 감동(?)먹은 영화의 도입부는 25년이 흘렀지만 어제처럼 생생하다. 온 국토가 병영화된 영혼마저 군기에 사로잡힌 이 땅의 젊은 영혼들의 서글픈 통과의례 장면이었다. 나의 마지막 극장다운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이었다. 그 후 90년대 초반 공장생활을 하면서 ‘파업전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DVD로 단체관람한 것이 나의 영화와의 마지막 인연이었다.
이 책을 구입한 지가 벌써 2년이 넘었다. 물론 미학자 진중권이라는 이름에 이끌려 덥석 책을 집어 든 것이다. 저급한 애국주의에 편승한 심형래의 ‘디워’ ‘라스트 갓 파더 ’의 본질을 예리하게 지적한 문화평론가의 이미지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외딴 섬 생활로 영화와는 거리가 먼 나에게 도통 책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방치만하고 있을 것인가. 최대한 ‘탄소 발자국’을 줄여 지구에 부담을 덜 준다는 삶의 철학을 지키려는 이상, 나의 삶에서 더 이상 스크린을 마주 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의 취향이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서나마 영화를 수용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책을 가까이하는 일이 유일한 낙이지 않은가. 그렇다. ‘예술에서 혁명은 내용이나 형식이 아니라 기술에서 먼저 일어난다(87쪽)’는 베냐민의 말처럼 저자는 디지털 기술이 영화의 내용과 형식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지를 10개의 주제로 나눠 37편의 영화를 미학적으로 조명했다. 하지만 나는 ‘기술의 진보가 인류의 행복이 아니라 인류의 절멸을 위해 사용되는 상황(280쪽)"에 비관한다. 그것은 보드리야르가 말한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시뮬라시옹’ 즉 이미 권력과 매체가 연출로 구성되는 거대한 허구(158쪽)‘이기 때문이다. 나의 유일한 위안은 ’살아있는 아이맥스 스크린‘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데 있다. 그것은 ’전통적 감성이 생명있는 유기체를 사랑한다면, 현대적 감성은 생명없는 무기체를 긍정하기 때문이다(103쪽)‘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인 보문사가 중턱에 위치한 낙가산이 가운데 자리잡은 석모도가 바다건너 정면으로 보인다. 그 바다의 사시사철 변화하는 역동성을 눈 가는대로 볼 수 있는 나의 방 전망에 절대만족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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