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눈이 온다는 대설 아침입니다. 하지만 올 겨울은 눈이 귀합니다. 흔적만 보인 첫눈이 온지가 꽤 오래입니다. 눈다운 눈은 아직 구경도 못 했습니다. 늦은 해는 이제야 봉구지산 정상을 넘어와 느리 마을을 비춥니다. 저희 집이 봉구지산 등산로 초입이라 마을 정경이 렌즈 안에 다 들어왔습니다. 저 멀리 섬의 큰 마을인 진말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산자락에 걸려 있습니다. 고갯길이 끝나는 허공은 바다입니다. 1년이 채 안된 진순이(진돗개 트기)가 신기한 지 카메라를 들고 나온 저에게 눈길을 주고 있습니다. 앞산 솔숲에서 공포에 찌든 어느 짐승의 울부짖음이 들려옵니다. 저는 올무에 걸린 고라니인 줄 알았습니다. 그때 앞집 형님이 산을 거슬러 올라 닭장으로 향합니다. 매입니다. 닭장 위 높은 가지위에 올라앉은 매를 보고 닭들이 공포에 쩔어 내지르는 비명이었습니다. 아! 조류의 목구멍에서도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있구나. 제가 고라니를 떠올린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2 ~ 3일 동안 진순이가 한밤중에 마주 짖어댔습니다. 저 녀석이 왜 저러지. 아침에 텃밭으로 눈길을 돌리면 고라니 발자국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김장을 하시면서 어머니는 무슨 생각이셨는지 배추 한포기를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 푸성귀를 노리고 고라니가 밤중에 텃밭까지 진출한 것입니다. 배추 속과 잎사귀는 모두 뜯기고 억센 겉 줄기만 남아 차진 날씨에 얼어붙었습니다.
언덕을 오르는 길가 가드레일이 둘러진 자투리땅에 어머니는 겉보리를 뿌렸습니다. 파릇한 새싹이 보기 좋습니다. 며칠 전에 어머니는 수확해 둔 겉보리로 엿기름을 짜 고추장을 담그셨습니다. 경사진 밭 진입로가 끝나는 지점의 작물은 시금치입니다. 생명력이 강한 시금치는 한겨울에도 나물을 무쳐 먹습니다. 검정 비닐이 깔린 두둑은 양파입니다. 그리고 그 옆 두둑은 쪽파입니다. 어릴 적 저는 땡땡 언 텃밭의 대파를 캐 짚불에 구워 먹었습니다. 익어가면서 노란 즙액이 나오는 대파를 두 손에 얹어 호호 불면서 겉껍질을 벗겨 먹습니다. 알싸하면서도 매콤한 맛이 아직 저의 혀끝에 남아 있습니다. 텃밭 구석의 부직포를 씌운 두둑은 마늘입니다. 물론 보온을 위해 부직포 안에는 짚을 한 겹 깔았습니다. 두더지와 지렁이는 어떻게 겨울을 날까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보시다시피 우리 텃밭은 지대가 아주 높습니다. 그래서 가장 걱정되는 것이 장마철입니다. 올 여름 두 달 동안 쉴 새 없이 퍼부은 비로 밭 흙이 너무 많이 패여 유실되었습니다. 이러다가 돌밭이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의 피해에서 우리 텃밭도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손바닥만한 작은 텃밭이지만 채소를 키우면서 어머니와 저는 작은 갈등을 빚습니다. 저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일절 주지 않으려하고, 어머니는 일생을 농사로 살아오신 분답게 벌레 피해를 두고 보지 못 합니다. 어쩔 수없이 제가 손을 들 수밖에 없겠지요. 참! 텃밭의 배추 포기를 탐내던 고라니는 어떻게 지낼까요. 그리고 어머니는 무슨 생각으로 배추 한포기를 남겨 놓으셨을까요. 그 속내를 저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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