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절하고 싶다
지은이 : 함민복
펴낸곳 : 사문난적
겉표지 이미지가 재미있다. 이 책에 나오는 77편의 시를 쓴 사람들의 이름이 순서대로 나열되었고, 그 이름들을 향해 깊게 허리를 굽힌 실루엣은 아마! 시인일 것이다. 그리고 실루엣과 어울리는 자필서명. 여백 많은 한 폭의 문인화를 대하는 느낌이다. 책을 펴낸 곳 이름이 너무 불온하여 마음에 든다. ‘사문난적’ 이라. ‘성리학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지 않는가. 즉 경전의 해석을 주자학을 따르지 않고 독창적으로 해석한 박제가를 비롯한 북학파를 이른다. 하긴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말아먹어 민중들을 도탄에 빠트린 현 시대에 시인은 사문난적일 수밖에 없다. 시인의 주례를 선 작가 김훈은 시인의 첫 에세이 ‘눈물은 왜 짠가’에서 시인을 두고 이렇게 평했다. ‘가난과 불우가 그의 생애를 마구 짓밟고 지나가도 그는 몸을 다 내주면서 뒤통수를 긁고 있다.’고. 그렇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죽을 자유밖에 없는 약육강식의, 못가진 자를 핍박하는 이 시대에 시인은 비폭력, 불복종 저항(?)을 펼치니 ‘사문난적’이다. 출판사의 기획위원에 ‘함성호’라는 이름이 비친다. 함성호는 시인이면서 건축가다. 저자와 동성이면서 또래다. 낯이 익다. 그렇구나.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인 ‘자본주의의 약속’에 해설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 책의 표제도 권하지 않았는가. 표제는 고은의 ‘저녁 무렵’의 한 구절을 빌려왔다.
절하고 싶다 / 저녁 연기 / 자욱한 먼 마을(36쪽, 전문)
책의 서문으로 시인의 자작시 시인 1, 시인 2 두 편이 실려 있고, 77편의 시인들의 시에 짧은 감상을 덧붙인 ‘시인의 마음으로 시 읽기’가 본문을 차지하고, 마지막으로 시를 쓴 사람들 77명의 짧은 약력으로 마감한 것이 이 책의 구성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을 나는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시로 여는 아침’을 통해 미리 보았었다. 시인은 ‘관념을 관념으로 노래하지 않고 어떤 구체적 사물의 힘을 빌려 노래한 시들이 좋다'고 한다. 실린 시들에는 詩聖 두보와 宋代의 선승 야보 도천, 아시아 최초의 노벨상 수상작가 타고르, 17세기 영국 시인 존 단,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 작가 프리모 레비와 중국 조선족 작가 리삼월은 외국작가이고, 고려 문인은 이규보, 조선 문인은 이달과 권필이 등장한다. 시인이 강화도에 정착한 것이 15년이 넘어섰다. 그리고 장가도 가고, 살림집도 꾸렸다. ’강화도 시인‘이라는 닉네임이 부끄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잡고 나서 시인이 이제 완전히 뼈속까지 강화도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이규보와 권필의 시 때문이다. 조선 숙종 때 남용익은 ’호곡시화(壺谷詩話)‘에서 고금의 뛰어난 시인을 뽑았는데, 고려의 3인중 이규보의 묘는 강화도 길상면 백운곡에, 조선의 3인중 권필의 유허비가 강화도 송해면 오류내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내 책장에는 시집 100여권이 자리 잡았다. 순전히 시인을 친구로 둔 업보였다. 시인을 만나고 뒤늦게 나는 시를 읊는 맛을 알았다. 시인을 만나기 전까지, 나의 손을 거쳐 간 시집은 고작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박노해, 백무산, 김남주 등 투쟁과 저항시 일변도였다. 경직된 나의 시선에 시는 고작해야 ‘낭만적 감성의 부산물’로 간주될 뿐이었다. 시인을 처음 만난 그해 여름. 교지편집하는 후배들이 강화도에 MT를 왔다. 전등사 입구 매점 파라솔이 처진 간이의자 쉼터. 청량음료를 들이켜며, 후배들에게 지나가는 말로 나는 한마디 했다.
“니네들, 함민복 시인이라고 아니”
나의 무딘 시적 감수성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가만 있으면 중간이나 갈 것이지. 한 여학생이 그 자리에서 시를 암송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다. 나의 삶에서 잊을 수 없는 詩가 되었다.
판셈하고 고향 떠나던 날/마음 무거워 버스는 빨리 오지 않고/집으로 향하는 길만 자꾸 눈에서 흘러내려/두부처럼 마음 눌리고 있을 때/다가온 우편배달부 아저씨/또 무슨 빚 때문일까 턱, 숨막힌 날/다방으로 데려가 차 한 잔 시켜주고
우리가 하는 일에도 기쁘고 슬픈 일이 있다며/공업고등학교을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또박또박/붙여오던 전신환 자네 부모만큼 고마웠다고/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열심히 살라고/손목 잡아주던/자전거처럼 깡마른 우편배달부 아저씨/낮달이 되어 쓸쓸하게 고향 떠나던 마음에/따뜻한 우표 한 장 붙여주던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59쪽 ‘우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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