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
지은이 : 은종복
펴낸곳 : 이후
어머니는 밥솥 뚜껑에 맺는 물방울을 행주로 훔쳤다. 나는 가마솥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풍구질을 했다. 오른손은 풍구를 돌려 바람을 일으켰고, 왼손은 왕겨(방앗간에서 도정한 알곡의 껍질)를 한주먹씩 집어 아궁이에 던져 넣었다. 풍구가 일으킨 바람으로 아궁이 안에 쌓인 왕겨는 쉭쉭! 소리를 내며 불꽃을 널름 거렸다. 굴뚝과 통한 구들장의 흡입력으로 누런 연기가 발꿈치까지 나왔다가 다시 아궁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욕심을 내 풍구의 바람통 위에 왕겨를 수북이 쌓고 풍구를 신나게 돌렸다. 일순간 펑! 소리가 나며 타들어가던 왕겨가 아궁이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쯔쯔, 그러게 조심하랬지” 어머니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앞머리가 불길에 눌어붙어 옥수수수염처럼 비비 꼬이며 떨어져 내렸다. 나의 어릴 적 가마솥의 물 끓이던 추억이다. 그 추억 때문이었을까. 지은이와 출판사가 생소한데 나는 책을 집어 들었다.
여기서 풍구가 바로 풀무다. 풀무질이란 대장간에서 불이 잘 일도록 바람을 넣는 기구다. 대장간의 큰 풀무는 발로 풀무질을 했고, 내가 불을 때던 풍구는 손으로 바람을 일으켜 불을 때웠다. ‘풀무질’은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앞에 있는 인문사회과학 서적이다. 저자가 1993년 인수했으니, 19년이 되었다. 나의 대학시절인 80년대는 대학 앞에 인문사회과학 서적이 꼭 한 두 군데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다. 80년대 인문사회과학서적은 ‘혁명의 무기고’였다. 무려 140여개의 책방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많던 인문사회과학 서적은 어디로 갔을까? 서울대 앞 ‘그날이 오면’, 건국대 앞 ‘인서점’, 전남대 앞 ‘청년글방’이 고작 명맥을 잇고 있을 뿐이다. 그 유명했던 연대 앞 ‘오늘의 책’과 고대 앞 ‘장백서원’도 대책위가 꾸려져 살릴려고 노력했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1년 최초의 사회주의국가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이 무너지자 인문사회과학서적은 내리막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80년대와 90년대 중반까지 대학가의 ‘불온(?)’한 책방들은 진보적 사상과 이념을 전파해 사회변혁을 추동한 기관차였다. 그러기에 나는 ‘풀무질’ 책방의 주인이면서 이 책의 저자에 애정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다.
책에는 ‘풀무질’ 책방을 인연으로 참삶을 추구하는 단골손님들의 글 21편이 실려 있다. 학생, 시민운동가, 교사, 교수, 심지어 경찰(이 땅의 경찰들이 이분처럼 올바른 생각을 갖고 있다면)까지. 여기에 실린 글들은 미제국주의의 이라크 침공으로 죄 없는 어린이들이 난리 통에 죽는 것을 막기 위해 ‘세계공동반전운동’에 참여하자는 호소 글을 시작으로 책방 손님들에게 평화, 인권, 생태, 장애인, 소수자, 약자 등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A4 용지에 적어 나눠 준 17년 동안의 쪽지 글이 묶였다. 저자의 꿈은 이 세상의 미래세대에게 맑고 밝은 세상을 물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갈수록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진흙탕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러기에 외아들인 형근이를 무한경쟁만 키워주는 제도권 학교에 보낼 수 없었다. 형근이는 대안학교인 ‘삼각산재미난학교’를 졸업하고, 현재는 ‘제천간디학교’에 다녀 떨어져 살고 있다. 현재 이 세계는 다섯 살이 안된 아이들 가운데 5만명이 넘는 아이들이 날마다 굶주림, 전쟁, 질병으로 죽는다. 또한 하루 1달러도 안되는 생활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13억명이나 된다. ‘자동차 한 대 만드는데 쓰는 물이 40만리터다. 한해동안 자동차가 5천만대 생산된다고 한다.(285쪽)’ 그런데 15억 인구가 깨끗한 물이 없어 고통 받고 있다. 나는 철부지였다. 내차는 12년 묵은 코란도 밴으로 똥차다. 올해 차를 새로 살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 책을 잡고 마음을 접었다. 저자는 현재 30여 곳의 시민단체에 기부금을 낸다. 후원단체와 기부액수를 새해에는 더 늘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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