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닥치고 정치

대빈창 2012. 3. 26. 04:58

 

 

책이름 : 닥치고 정치

지은이 : 김어준

엮은이 : 지승호

펴낸곳 : 푸른숲

 

80년대 중반, 대학가의 지하 민속주점. 홀은 텅 비었고, 구석진 자리에 달랑 두 남자가 한 테이블에 앉아 막걸리 잔을 비우고 있었다. 안주는 도토리묵이다. 둘은 같은 학번이었지만 한 사람은 3학년이었고, 다른 사람은 1학년이었다. 예비역으로 같은 과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동기에게 표를 부탁하는 중이었다. 단과대 학생회장에 출마했기 때문이다. ‘뭐야! 새꺄. 이 깽깽이 새끼가 어디서.’ 테이블이 엎어지고 막걸리 잔이 허공을 날았다. 표를 부탁하던 남자는 졸지에 얼굴에 막걸리를 뒤집어 쓴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고향을 묻길래 ‘전라도 광주’라고 대답하자마자 술잔이 날아 온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젊은 혈기가 넘쳤던 나는 마초기질이 유난했다. 그러기에 앞뒤 안 가리고 옳지 않다 싶으면 무조건 충돌했다. 그때 내께 전라도 사람들은 앞에서 웃음을 짓지만, 끝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일개 의식이 조작된 좀비였던 것이다. 휴학을 하고 탄광을 어슬렁거리다 노가다 판을 기웃거리다, 복학하니 87년도였다. 이 땅의 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해이지 않은가. 무모하고 단순한 마초도 그 엄청난 혁명적 이념의 세례를 피할 수 없었다. 나를 그 길로 이끈 것은 선배도 동아리도 소모임도 아니었다. ‘녹두꽃’이라는 무크지를 잡고 나는 스스로 그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학창시절 내내 사회과학서적만 잡았다. 그리고 나는 현장으로 들어갔다.

며칠 전 나는 옆 섬 볼음도에 출장을 갔다. 좋아하는 친구가 자녀 교육 문제로 겨울을 인천에서 지내다가 영농 준비를 하느라 섬에 들어왔다. 나는 미리 택배로 홍어회를 시켰다. 친구와 나는 삭힌 홍어 맛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술자리에 10여명의 사람이 모이게 되었다. 얼마 안 되는 홍어회를 묵은지에 싸 담근 탁주를 마셨다. 술자리 대화는 흑산도 홍어에 얽힌 에피소드와 남대문 방화사건, 향일암과 농월정의 화재로 인한 소실에 대한 안타까움.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섬 주민들이 사장이라고 호칭하는 낯선이가 민주당 한명숙 대표를 대뜸 빨갱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이 아닌가. 한술 더떠 한국전쟁당시 영동 노근리의 양민학살사건은 어쩔 수 없었다고 옹호하는 것이 아닌가. 베트남 전쟁시 한국군이 베트콩을 잡기 위해 한 마을을 소탕하듯이, 미군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 이게 말인가. 막걸리인가. 다혈질인 나는 당연히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술자리는 거기까지였다. 사람들이 분위기를 추스르고, 나는 길을 나서는데 그이가 밖에까지 나와 손을 내밀었다. 지팡이를 쥔 그이는 다리가 불편했다. 혹시 월남 파병용사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또 다른 ‘스톡홀름 증후군’이 아닐까.

사족이 너무 길었다. 좌·우의 이념적 차이를 타고난 기질로 보는 저자에 대한 나의 답변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이 땅의 정치판을 읽는 탁견에 놀라고,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에 까무라쳤다. 이 책은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와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이 2011년 5월에 녹취했다. 그런데 현 시점의 정치 판세를 정확히 예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선에서 박근혜의 대항마로 문재인의 부상을 정확하게 내다보았고,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 그리고 진보신당 탈당파의 통합을 그렸다. 지금의 통합진보당이다. 그리고 한나라당의 대표로 홍준표를 꼽았다. 지금은 홍준표도 물러나고, 박근혜 비대위 체제를 거쳐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었지만. ‘백만민란’의 문성근은 민주통합당의 대표위원이 되었다. 저자는 진보 진영의 천하삼분지계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 땅의 국민정서상 진보정당은 민주당의 종속변수라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당으로의 ‘헤쳐! 모여‘를 부르짖는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나는 그 잘난 척(?)하는 PD 계열이다. ’92년 총선에서의 민중당과 대선의 민중후보 백기완을 시작으로 줄기차게 진보진영의 독자 정치세력화를 꿈꾸었다. 오죽하면 어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다 하실까. ‘어째 우리가 찍는 사람들은 한 명도 당선이 안돼니’ 20년 만에 그 기록이 깨질지도 모르겠다. 12월 대선에 야권연대 후보로 문재인이 나선다면. 하지만 나는 총선에서 비례후보는 녹색당에 표를 던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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