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서울 이야기

대빈창 2012. 5. 17. 05:30

 

 

 

 

책이름 : 서울 이야기

지은이 : 정기용

펴낸곳 : 현실문화연구

 

김석철, 김봉렬, 서현, 김개천, 정기용, 임석재. 내 책장 한 칸은 건축 관련 대중서가 자리 잡고 있다. 대체로 책은 부피가 커 고작 열댓권 남짓하다. 이 분야에서 처음 잡은 책은 ‘김석철의 세계건축기행’으로 15년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나는 1년에 한권 꼴로 이 분야 책을 잡았다. 이 방면에 전혀 문외한인 내 자신이 의아하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연결고리를 찾을 것도 같다. 그것은 건축가에게 ‘인문학적 사유’가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시인 함성호는 시인이기 이전에 건축가이기도 하다. 건축가 정기용 선생은 작년 3월에 돌아가셨다. 나는 사후에 만난 ‘사회적 건축가’, ‘생태적 건축가’, ‘감응의 건축가’를 아쉬워하며 ‘사람·건축·도시’를 블로그에 포스팅했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나고, ‘서울 이야기’를 펼쳤다. 이 책에는 1987년의 ‘럭키금성 트윈타워’에서 2007년 미발표 원고 ‘서울의 풍경들’까지 20여년에 걸친 저자의 주옥같은 서울에 관한 글들의 모음집이다. 문학적 소양이 있다는 독자들은 한번 선생의 책을 잡기 바란다. 선생의 인문학적 사유의 폭과 깊이는 혀를 내두르게 한다.

용산미군기지, 세종로, 북촌, 선유도공원, 서대문형무소, 천년의 문, 전쟁기념관, 국회의사당, 예술의 전당, 국립중앙박물관, 서울시립장제장, 일산 러브호텔, 서울대 관악캠퍼스, 서울시청사. 이 책에 등장하는 건축물들이다. 선생은 누구나 입만 열면 내뱉는 문화도시의 제 1덕목을 이렇게 규정했다. ‘기본이 바로 선 도시’가 문화도시라고. 여기서 기본이란 ‘시민들이 쾌적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기초가 바로 선 도시(162쪽)’를 말한다. 그렇다면 서울이라는 도시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공간에 역사와 시간이 누적되는 것을 참아내지 못하는 병에 걸린 듯한 비문화적 풍토(133쪽)’로 ‘방임된 천민자본주의와 결탁한 정치권력의 합작품(201쪽)‘이다. 이는 온 국민의 꿈과 시선을 아파트 당첨과 연속극에 묶어 놓았고, 세계에 대해서는 민족주의 감성을 자극해 눈물 흘리게 하고, 안으로는 남침을 경계해야 한다고 윽박지르며 전 국토를 공장화시킨 그들의 천박한 탐욕으로 드러났다.

“미완의 건물 ‘예술의 전당’”을 읽어 나가다 나의 눈길이 멈칫거린다. 그렇다 나는 아직 ‘예술의 전당’에 발걸음이 머물지 못했다. 아니 외딴 섬에 처박힌 삶으로 나의 생애에 있어 그것은 불가능해졌다. 10여년전 십자인대 파열로 수원의 한 정형외과에 입원해 있으면서 그때 ‘예술의 전당’에 전시되었던 ‘서양미술 400년전’을 관람하려다가 불편한 몸으로 도로아무타불이 된 적이 있었다. 그 희미한 기억의 끄나풀이 또 다른 ‘예술의 전당’에 연결되었다. 나는 책장에서 김석철의 ‘천년의 도시 천년의 건축’을 빼들었다. 여기서 건축가는 2년 동안 시대의 문화 인프라(예술의 전당)를 만든 일에만 매달린 것을 자랑스럽게 회고하고 있다. 제5공화국 군홧발 정권시절이었다. 하지만 ‘공간의 시인’는 육중한 석조 벽체에서 군부독재의 권위주의를 읽고, 시민의 발길과는 거리가 먼 동떨어진 산기슭에 자리한 위치에서 선택적 폐쇄주의를 확인한다.

선생의 많은 닉네임 중에서 나는 ‘감응의 건축가’가 가장 와닿았다. 선생은 1996년부터 10년 동안 무주 프로젝트로 전북 무주에 공공건물 30여채를 지었다. 그가 안성면사무소를 지으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민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때 주민들은 버스를 대절해 1년에 몇 번 대전으로 목욕을 다녀왔다. 건축가는 목욕탕 딸린 면사무소를 지었다. 지금도 목욕탕은 짝수 날은 여탕, 홀수 날은 남탕이 된다. 또한 무주공설운동장을 지으면서 본부석의 군수만 그늘에 앉아있다는 주민들의 불만에 군수가 등나무를 심고, 건축가는 나무를 받쳐주는 구조물을 만들어 그늘을 드리웠다. 그리고 서귀포 '기적의 도서관'을 지면서 열댓그루의 소나무를 살리기 위해 건물을 도넛처럼 에워쌓았다. 지금은 건물 한가운데 소나무가 우뚝 솟았다. 이러기에 선생을 ‘생태적 건축가’라 불렀던 것이다. 수많은 건축물을 지은 건축가는 죽을 때까지 자기 집 없이 31평짜리 전세 다세대주택에서 살았다. 하지만 생전의 그는 자기 집은 100만평이라고 소개했다. 너스레가 아니다. 북악산에서 뻗은 낮은 뒷산에서 종묘, 창덕궁, 후원과 낙산까지 눈 닿은데까지가 건축가의 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선생은 돌아가시면서 유언없이 이 말만 남기고 가셨다. ‘나무도 고맙고, 바람도 너무 고맙고, 하늘도 고맙고, 공기도 고맙고,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후기를 쓴 홍성태 교수의 말대로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적극 실천한, 참으로 보기 드문 건축가‘였다. 돌아가시고 난뒤 선생을 뒤늦게 알았지만 이 땅에도 걸출한 건축가가 계셨다는 사실에 나는 가슴이 한껏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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