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지도에 없는 집
지은이 : 곽효환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시집은 분명 ‘문학과지성 시인선’이었다. 겉표지 이미지가 시인의 컷 이었기 때문이다. 18년이나 지난 그 일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90년대 중반 경기 수원의 어느 교육원. 나는 동기 40여명과 함께 4주 합숙으로 신규자 실무 교육을 받고 있었다. 공장노동자 생활을 하다 다리가 부러져, 현장을 포기하고 치른 공채시험에 운 좋게 합격한 내게 교육은 시시껄렁하기 짝이 없었다. 신입의 기합 든 목청껏 내지르는 고함과 번득이는 살아있는 눈빛은커녕 어떡하면 시간을 때울까 요령을 피우던 나는 연신 하품만 토해내고 있었다. 그래도 학부시절 들은 풍월이라도 있었던가. 대학교수 시인의 강의 시간에 게슴츠레하던 나의 눈길은 강단을 향하고 있었다. 그때 강사가 시집 한권을 치켜들었다. 이제 막 출간된 따끈따끈한 자신의 신간 시집이었다. 강의에 충실한 피교육자의 상품으로 마련했단다. 그 시절 나에게 시인이라면 김남주, 박노해, 백무산이 전부였다. 그 시집이 여적 나의 뇌리에 각인된 것은 순전히 겉표지의 컷 때문이었다. 그때 시인 강사는 세련되게 푸른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시시껄렁하게 보이던 내게 강사의 말실수가 귀에 들려왔다. 그는 교육생들에게 자신의 덜렁거리는 와이셔츠 맨 윗단추를 보여주며 이렇게 덧붙였다.
“이 와이셔츠는 오늘 강의를 위해 와이프가 백화점에서 구입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 아침 포장을 뜯었다. 그런데 단추 하나가 이렇게 덜렁거린다. 이것은 한국여성들의 찬찬치 못한 성격을 말해준다.
나의 조급한 성미는 강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들었다.
“교수님은 이 땅의 여성노동자들이 어떤 노동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혹시 컨베이어벨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늘어진 단추는 한국여성의 품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열악한 노동환경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강사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 시절 나는 날카롭게 각진 시선으로 이 사회를 훑고 있었다. 그때 일이 돌연 떠올랐을까. 나는 온라인 서적 검색창에 강사의 이름을 입력하고, 책들을 훑어보았다. 그런데 낯익은 이름이 눈에 띄지 않는가. 문학인들이 회고하는 아버지의 생애와 삶을 담은 책의 공동 엮은이였다. 그렇다. 시인과 책을 공동으로 엮은이는 나의 학부 동기였다. 시집을 손에 넣기까지 사족이 너무 길었다. 80년대 중반. 이 시집의 시인과 나는 문학수업을 같이 들었다. 시 '그리운 청년, 최일남’에서 그 시절을 회고하듯 시인은 학창시절 대학신문 기자였다. 그리고 지금은 대산문화재단 사무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이 시집은 시인의 두 번째 시집으로 3부에 나뉘어 61편의 시가 실렸다. 연작시로 ‘열하기행’ 8편과 ‘황토고원’ 3편이 말해주듯 시인의 발걸음은 고구려의 고토였던 만주와 중국 남부의 상해임시정부 유적지 그리고 서역 등에 머물렀다. 문학평론가 정과리는 해설 ‘삶을 비워 사랑하기’에서 시인의 시를 ‘민중적 서사시’로 규정했다. 시인과 내가 캠퍼스에서 젊음을 구가하던 시절은 ‘민중’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졌다. 시집에서 나는 이 시가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더듬이를 있는 대로 늘어뜨린 / 등 굽은 은백의 달팽이 한 마리 / 굳은 표정으로 꼼짝 않고 자리를 지키던 콘크리트 고가차도를 허문 / 혜화동 로터리에 새로이 난 버스중앙차도를 / 느리게 느리게 그러나 거침없이 가로지른다 / ㄱ자로 허리를 꺽은 노파가 사력을 다해 끄는 / 페지 더미를 가득 실은 손수레 / 거침없이 내닫는 속도를 /온몸으로 위태롭게 그러나 천천히 더디게 가로막는 / 늙은 달팽이의 아슬아슬한 외출 / 제 몸뚱이보다 몇 배는 더 큰 삶의 집을 끄는 /그네는 안다, 속도와 풍경을 압도하는 /느림과 멈춤의 힘을 / · · · · · ·.(달팽이 中에서,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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