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당신은 누구십니까
지은이 : 도종환
펴낸곳 : 창비
저것은 벽/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그때/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물 한방울 없고 씨앗 한톨 살아남을 수 없는/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결국 그 벽을 넘는다.
시 ‘담쟁이’(82쪽)의 전문이다. 어려웠던 시절을 상징적으로 읊은 시를 나는 20여년 만에 소리 내어 읽었다. 이 시집은 초판이 ‘93년에 출간되었다. ’87년 국민대항쟁 및 노동자대투쟁이후 민중진영은 수구세력의 역공세에 휘말려 자신들이 확보한 영역까지 빼앗기고,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 어려웠던 시절, 전체 민족민주세력의 침잠된 국면을 쇄신시키며 전선을 사수한 것이 전교조였다. 시집이 출간되었던 ‘93년 나는 다리가 부러져 현장생활을 포기하고 암담한 심정으로 시골로 낙향했다. 시인은 ’89년 전교조 결성을 주도한 이후 해직과 투옥의 험난한 길을 걷고 있었다.
내가 20년이나 지난 묵은 시집을 잡은 것도 도발한 수구세력의 공세 때문이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검인정 국어교과서간행 출판사 8곳에 시인의 글을 모두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현재 교과서에는 시인의 시 ‘담쟁이’등 5편과 2편의 산문 모두 7편이 실려 있다. 다행히 중앙선거위의 올바른 해석으로 시인의 글들은 교과서에 그대로 살아남게 되었다. 일제에 부역한 세력이 해방이후 권력을 잡은 이 땅은 어이없는 일들이 곧잘 터진다. 오히려 친일시인 서정주, 모윤숙의 시와 제5공화국 군홧발 정권에서 민정당 전국구의원이었던 김춘수의 ‘ 꽃‘이 교과서에 버젓이 실려있다.
시인의 첫 시집은 ‘85년의 ’고두미 마을에서‘다. 하지만 시인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시집은 ’88년에 출간된 ‘접시꽃 당신’이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내에게 바친 시집은 수많은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시인은 현재까지 10권의 시집과 그에 버금가는 산문집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나는 시인의 시집을 처음 펼쳤다. 80년대 말와 90년대 초, 엄혹한 시대상황에 나는 그만큼 경직되어 있었다. 시집은 모두 4부에 나뉘어 68편의 시와 신경림의 발문이 실렸다. 실린 시들은 시인 특유의 여리고 아름다운 서정시들과 교육시, 옥중시가 함께 수록되었다. 나도 어느덧 나이가 먹었다. 시집을 넘기다 여기서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큰산으로 가는 길에는 깊은 물이 있다/물은 큰산을 품어 더욱 깊어지고/산은 물을 따라 내려가 더욱 맑아진다/마음이 크다는 것은 마음이 깊다는 것이다/마음이 깊다는 것은 마음이 맑다는 것이다(큰산 가는 길. 전문, 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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