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곤줄박이가 땅콩을 훔쳐가다

대빈창 2012. 9. 27. 06:14

 

 

 

올 추분은 주말이었습니다. 해가 많이 짧아졌습니다. 여명이 터오기 시작했습니다. 창고 구석에 처박힌 헌 등산화를 꿰찼습니다. 목장갑을 끼고 텃밭에 내려섰습니다. 이슬이 펑하게 내렸습니다. 땅콩 줄기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뽑아 올렸습니다. 땅콩 꼬투리가 줄줄이 딸려 올라 옵니다. 땅콩은 캐는 시기를 잘 맞추어야 합니다. 너무 늦으면 꼬투리 줄기가 끊어져 수확이 번거롭습니다. 땅속에 숨은 땅콩을 호미로 캘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대로 땅콩 캐는 시기를 잘 맞춘 것 같습니다. 한 시간여 만에 두 이랑의 땅콩을 뽑아 두둑에 가지런히 줄을 맞추었습니다. 어머니의 손에 깔방석이 들렸습니다. 어머니가 뿌리에 엉킨 흙과 꼬투리를 털어내고 땁니다. 저는 땅콩 꼬투리를 집 앞 마당에 편 그물에 넙니다. 올 땅콩 농사는 풍년입니다. 초여름 가뭄이 찾아왔을 때 어머니는 매일 물 호스로 어린 땅콩 밭에 물을 주셨습니다. 땅콩은 물빠짐이 좋은 모래땅에서 생육이 좋습니다. 그래서 땅콩 주요 생산지는 강을 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구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로 그 말도 옛말이 되었습니다. 가뭄이 한달 이상 지속되면서 모래땅에 심겨진 땅콩은 말라 죽었습니다. 모래는 물을 저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텃밭의 진흙땅이 수분을 좀 더 오래 품어 땅콩 열매가 알찹니다.

점심을 먹고 현관문을 밀치다 저의 눈은 휘둥그레졌습니다. 어망에 담겨진 먼저 수확해 좀 더 마른 땅콩을 작은 새가 쪼고 있었습니다. 참새는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녀석이 날아와 그물에 널린 땅콩을 부리로 쪼았습니다. 녀석들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습니다.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눈 앞에서 그물에 널린 땅콩을 쪼고 있습니다. ‘우리 새 백가지’를 뒤적입니다. 녀석들은 참새속 박새과 박새속에 속하는 곤줄박이로서 우리나라 텃새였습니다. 학명이 라틴어로 '여러가지 색으로 만들어진' 답게 머리, 어깨, 배, 날개, 꼬리 등이 다양한 색으로 덮혔습니다. 색감이 벨벳 원단처럼 부드럽습니다. 녀석들은 번식기에 주로 곤충을 먹지만 식물의 씨도 먹이로 삼습니다. 큰 씨는 나뭇가지 위로 가져가 발로 누르고 부리로 알맞은 크기로 부수어 먹는다고 합니다. 녀석들이 땅콩 꼬투리를 하나씩 물고 앞산 숲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어느만큼 시간이 흐르자, 세 놈이 전깃줄에 앉아 널린 땅콩을 내려다보며 뭐라고 재잘 거립니다. 뒤따라 나오시던 어머니가 한 말씀 하십니다.

“쬐그만 것들이 먹고 살겠다고 모여 들었네.”

어머니가 깔방석을 차 그림자에 내려놓고 자리를 잡습니다. 땅콩을 갈무리하려면 2 ~ 3일 더 햇볕에 말려야 합니다. 땅콩을 훔치려는 곤줄박이와 땅콩을 말리려는 어머니의 씨름이 바야흐로 시작되었습니다.

"삐비, 삐비, 삐비......"

음소리가 요란합니다. 녀석들의 편대 공습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편대는 3마리 입니다. 계단 난간, 밭담 턱, 전깃줄, 전봇대 손잡이, 화단 복숭아나무. 팔랑 팔랑 녀석들의 날개짓 소리가 꼭 부채질 소리 같습니다. 사람이 보는데서 땅콩을 부리에 문 녀석이 머리위 전깃줄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더니, 앞산 소나무 숲으로 날아갔습니다. 녀석들은 한쪽에 널린 찌끄레기를 용케 알아보고 어머니와 내가 번갈아 지키는 그물에 널린 땅콩을 노립니다.

'애야, 할 수없다. 새들이랑 나눠 먹을 수밖에"

사람 코 앞에서 땅콩을 물고 휑하니 달아나는 녀석들을 보고 어머니가 말씀 하셨습니다. 하루이틀 더 말려 어망에 담아 아궁이가 있는 봉당에 걸어야겠습니다. 겨울 간식거리 갈무리도 수월치 않습니다. 저는 점심을 먹고 깔방석을 챙겼습니다. 본격적으로 녀석들의 공습을 막을 작정입니다. 차그늘에 앉아 읽던 책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아침나절 그렇게 극성이던 녀석들이 오후에는 그림자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배가 부른 것일까요. 녀석들의 식사 시간은 오전인가요. 아니면 오후에 다른 먹을거리를 찾아 떠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곤줄박이는 뻔뻔하기도 하지만 아주 귀여운 녀석입니다. 땅콩을 지키면서도 저는 녀석들이 나타나기를 내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