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저녁을 먹고 산책에 나섰습니다. 대빈창 해변 솔밭에 야영 텐트가 대 여섯동 자리를 잡았습니다. 고향을 찾았다가 옛 추억이 그리워 싸늘한 날씨에도 바깥 잠을 청하나 봅니다.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추레한 몰골을 한 진분홍의 저녁 노을위에 부피감이 뚜렷한 먹장구름이 하늘의 성채처럼 걸렸습니다. 봉구산자락으로 접어듭니다. 날이 흐려서인지 하늘에 달이 보이지 않습니다. 시간은 낮과 밤의 경계입니다. 벌판의 벼들이 이삭이 무거워 한껏 고개를 숙였습니다. 말그대로 황금빛 들녘입니다. 내일모레 농부들은 벼베기를 할 날을 손꼽을 것입니다. 15호 태풍 볼레반에 휘둘린 고추 포기에 새잎이 돋았습니다. 고구마는 태풍이 지나간 후 넝쿨을 바짝 땅에 대고 눈치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섬 주민들에게 가장 바쁜 철이 돌아왔습니다. 벼베기와 고구마 수확이 겹치는 시기입니다. 낮의 빛 알갱이 입자 속으로 밤의 검은 그림자가 삼투압처럼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집 가까운 낮은 고개 마루에 다다르자, 거짓말처럼 봉구산 능선에 훤한 보름달이 불현 듯 나타났습니다. 카메라를 챙겨 슬라브 옥상에 올랐습니다. 위 이미지는 추상화의 절대주의 창시자인 러시아의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흰 바탕에 검은 네모꼴’ 작품 같습니다. 다만 정 중앙에 보름달이 박혔습니다.
추석은 중추절, 한가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음력 8월 15일로 우리 민족에게 설날 다음으로 큰 명절입니다. 햅쌀로 송편을 빚고, 햇과일로 차례상을 장만합니다. 벌초(伐草)를 하고, 조상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묘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웃들과 음식을 나눠 먹으며 ‘1년 열두달 365일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듯이 풍성한 계절입니다. 작은 섬 주문도가 추석을 쉬러 온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거주하는 주민수보다 부모님을 뵈러 온 자식들이 더 많습니다. 선창에는 추석을 쉬고 나가려는 차량들로 나래비가 섰습니다. 한복으로 곱게 추석빔을 차려입은 이가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삶의 고단함이 몸치장까지 신경쓰지 못했습니다. 하긴 저는 지천명인 이 나이까지 한복을 입어보지 못했습니다. 밭가의 아버지를 뵙습니다. 아버지가 묻히신 모과나무 주변에 막걸리를 붓고 두부튀김을 놓아 드렸습니다. 풍요롭지 못한 올 한가위 때문인지 사진 속의 보름달이 야위어 보입니다. 올 여름은 열대야와 태풍과 폭우로 기억에 남습니다. 벼이삭이 여물 때 불어 닥친 태풍 볼레반으로 벼는 쭉정이만 남았습니다.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떨어진 낙과로 과수원의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작년 우리나라의 곡물자급율은 최저인 22.6%를 기록했습니다. 쌀마저도 83%로 추락했습니다. 올해 쌀 자급율도 90% 이하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곡물 수입국 세계 5위입니다. 아버지가 제게 뭐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연휴가 끝나고 섬은 한적하고 고요한 침묵 속에 다시 빠져 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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