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변방을 찾아서
지은이 : 신영복
펴낸곳 : 돌베개
방안이 온통 환합니다. 쌓인 눈에 난반사된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새해 첫날입니다. 예년처럼 봉구산 정상에서 해돋이를 볼 수 없었습니다. 여명이 터오기도 전에 배터로 향하는 길에서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으며 눈을 치웠습니다. 첫배를 타는 섬 주민들을 위한 길닦이입니다. 모두 ‘서설’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하지만 무거운 눈에 짓눌리는 듯한 절망과 좌절은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작년 지구촌에 60여개 나라에서 선거가 있었습니다. 미국은 첫 흑인 대통령인 민주당 오바마가 연임에 성공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17년 만에 사회당 프랑수아 올랭드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좌파정권이 탄생 했습니다. 베네수엘라는 반미의 기수인 차베스가 4선에 성공했습니다. 지중해 연안의 재스민 혁명의 민주화 바람은 여전히 거셉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유신 독재의 악몽이 떠 올려지는 선거 결과가 드러났습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싸움이 더욱 힘겨워 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번 대선의 당락을 결정지은 세대는 50대 였습니다. 6·10 국민대항쟁을 통해 이 땅에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시키고, 선거혁명으로 참여정부를 탄생시킨 그들이 90% 가까이 투표에 참여하여 유신정권의 적자에게 몰표를 주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이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내심 이번 대선에서 제가 마음먹은 후보가 25년만에 당선된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유일하게 대학물을 먹인 막내아들의 정치성향에 따라 기꺼이 표를 던진 여든 되신 홀어머니도 당신 손으로 처음 뽑은 대통령이 다스리는 것을 보며 눈을 감게 되시리라고 행복한 상상을 하였습니다. 저의 꿈이 공상이 된 것을 보며 너무 당혹스러운 요즘 입니다.
자택에서 투신 자살한 아우슈비츠의 증언자 프리모 레비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괴물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인 인간들 말이다.” 프리모 레비는 24살부터 이탈리아 빨치산 투쟁으로 파시즘에 대항하다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끌려갔습니다. 필사적으로 살아남은 그는 수용소의 야만을 증언하기 위해 작가의 길을 걷습니다. 그가 갑자기 생을 놓아 버렸습니다. 대선이 있은 작년 19일 이후 노동자와 시민활동가 4명이 연이어 목숨을 끊었습니다. 너무 큰 절망과 좌절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흔들리는 저를 붙잡기 위해서라도, 이 야비한 시대에 제가 변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선생님의 책을 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해 첫날 눈 쌓인 바깥 풍경이 유리창에 어룽져 방안이 환합니다. “‘변방을 찾아가는 길’이란 결코 멀고 궁벽한 곳을 찾아가는 것이 아님을, 각성과 결별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바로 변방(144쪽)”이라는 선생님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마지막 책장을 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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