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종을 훔치다

대빈창 2013. 2. 28. 07:02

 

 

 

책이름 : 종을 훔치다

지은이 : 이시백

펴낸곳 : 검둥소

 

표지 그림의 흑인 혼혈아 여학생은 정미다. 어머니는 기지촌 양색시로 흑인 미군 병사를 만나 정미를 낳았다. 하지만 아빠는 미국으로 건너가 약속을 어기고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는 화병에 알콜중독자로 전락했다. 고3인 정미는 아빠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뮤지컬 배우를 꿈꾸며 학교의 성극부에서 활동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박선호 국어선생은 기지촌의 불량학생 서클인 ‘부대찌개파’ 아이들로 ‘부대찌개’라는 연극부를 만들고 감싸 안는다. 기존 성극부 아이들은 모두 탈퇴하나, 아빠를 만나겠다는 꿈이 있는 정미는 연극부에 합류하여 청소년 연극제를 목표로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기적적으로 ‘부대찌개’ 연극부는 특별상을 수상하고, 정미는 우수 연기상을 가슴에 안았다. 나는 이 장면에서 가슴이 찡하고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연극제 우수상 수상자는 연극영화과로 유명한 대학에 특별 전형으로 입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최악의 마이너리티인 정미가 자기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홀어머니는 알콜중독자고, 정미는 별명인 ‘탄순이’인 흑인 혼혈아다. OECD에서 불멸의 자살대국 1위를 8년 동안 질주하는 대한민국에서 생존 자체가 기적이다. 하지만 이 꿈은 좌절된다. CEO 출신 새 교장이 인문고로의 전환을 막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상과 대표 정미의 앞날을 가로막은 것이다. 절망감에 정미는 학교 ‘종을 훔치다’. 그리고 종루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박선생은 제자 정미의 자살로 스스로 학교를 떠났다.

소설에는 여러 유형의 선생들이 등장한다. 교장 자리에서 각종 비리를 저지르다 체육선생으로 급전직하한 최충운 선생. 유일한 전교조 선생이었다가 파면된 이해창 선생, 전교조 분회장 백경훈 선생, 학교의 중심부로 들어가 개혁을 추구하다 실패한 이근호 교감, 자기 제자를 삼청대에 입소시켰다가 후에 봉변을 당하는 선생,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간성’을 허구헌 날 떠벌이지만 기회주의적 속성의 변주영 선생 등. 전교조가 태동하고 일제고사 거부로 선생이 해직되는 시기가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다. 공간적 배경은 인문계와 실업계가 같이 있는 미션스쿨인 승일종합고등학교다. 소설은 ‘교육’도 ‘상식’도 없는 ‘기업’이나 ‘공장’이 되어버린 사립재단 족벌들이 운영하는 사립학교로 대변되는 교육 현장의 치부를 드러냈다.

나는 학교 정문을 나서는 박선호 선생의 뒷모습을 보며 두 분의 선생을 떠 올렸다. 작가 이시백과 이계삼 선생이다. 작가는 남양주의 시골 학교에서 25년 동안 선생을 하다 사직을 했다. 그는 한 번도 인문계 학교로 가지 않았다. 공업고, 종합고로 떠돈 이유가 이 땅에서 버려진 아이들이 자신이 지켜야 할 자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십여년 전 첩첩산중 광대울로 들어가 글을 쓰고 있다. 그 소설들이 내 책장에 사이좋게 어깨를 겯고 있다. 그리고 이계삼 선생. 나는 젊은 선생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 다만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이라는 산문집 한 권을 잡았을 뿐이다. 선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의 모교에서 후배들을 한때 가르쳤다. 그리고 고향인 경북 밀양의 밀성고에서 자신의 제자들을 위해 분필을 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선생은 학교를 그만두고, 밀양송전탑건설 반대투쟁 사무국장으로 현장에 올곧게 두발을 딛고 있었다. 오랜만에 녹색평론에 선생의 글이 실렸다. 선생의 또 다른 에세이 ‘변방의 사색’이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 소설은 나의 정신에 올바른 자양분을 공급해주는 분들의 집결판이다. 요즘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주는 1인자 이시백. 그리고 내가 3대 문학평론가로 손꼽는 홍기돈의 해설. 표사에 한홍구와 박노자가 글 부조를 했다. 더군다나 일러스트는 최규석이다. 그리고 출판사는 참교육을 위해 애쓰는 우리교육이 만든 출판 브랜드 ‘검둥소’다. 이 소설은 진보주의자들이 합심하여 빚어낸 한 권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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