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대빈창 2013. 3. 6. 07:00

 

책이름 :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지은이 : 이문재

펴낸곳 : 문학동네

 

한때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주곤 했을 때

어둠에도 매워지는 푸른 고추밭 같은 심정으로

아무 데서나 길을 내려서곤 하였다

떠나가고 나면 언제나 암호로 남아버리던 사랑을

이름 부르면 입 안 가득 굵은 모래가 씹혔다

 

표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는 3부에 나누어 실린 71개 시편의 어느 구절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나는 시집을 읽어 나가면서 3곳에 북다트를 표시했다. 이 시집의 마지막 시 ‘길에 관한 독서(169 ~ 170쪽)’의 1연이다.  91 ~ 93쪽의 ‘내 젖은 구두를 해에게 보여 줄 때’라는 시에는 막상 '젖은 구두, 해'라는 단어가 보이지도 않았다. 166 ~ 168쪽의 '망자시(亡者詩) 1 ’중 3연의 ‘그대 젖은 신발 어디서 말리는지’라는 구절이었다. 속았다는 가벼운 기분마저 들었다. 그것은 시집의 표제는 시인이 선정한 대표시나 마음에 드는 한 구절을 끌어다 쓰는 전례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시집을 넘기다보면 쪽수 매김이 홀수만 적혔다.

제국호텔(2004), 마음의 오지(1999), 산책시편(1993), 내 젖은 구두를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1988). 시인은 ‘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업 30년 만에 시집은 고작 4권이다. 과작이다. 이 시집에는 自書가 2편이다. 시인의 첫 시집으로 1988년에 민음사에서 초판본이 나왔고, 2001년 문학동네에서 재출간하면서 양장본으로 펴냈다. 그러고보니 시인의 4권의 시집은 모두 양장본이다. 나는 시인의 시집을 출간 역순으로 잡았다. 그리고 산문집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를 덤으로 손에 넣었다.

‘나의 짧고 얕은 생태학적 관심은 제국과 만나면서 아나키즘을 호출하고 있다. 나는 이 변화를 자연스럽고, 또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아직도 구두는 젖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젖은 구두를 벗어 해에게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흠뻑 젖은 구두를 벗어 제국에게 보여주기도 할 것이다.’ 시집의 마지막 ‘자메이카 봅슬레이’라는 시인의 말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렇다. 이 시집은 도시 소시민의 일상과 시인의 어릴 적 회상이 주조를 이루었다. 두 번째 시집의 ‘산책’을 거쳐, 세 번째 시집 ‘마음의 오지’에서는 생태학적 상상력을 드러냈다. 그리고 시인은 구두를 벗어 제국에게 보여주고 있다.'제국호텔'

책날개를 펼친다. 시인은 1959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시인의 고향 김포 검단은 1995년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어 현재는 서구의 일부분이 되었다. 2006년 검단에 분당처럼 신도시를 조성한다는 암울한 계획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2008년 말에 불어 닥친 글로벌 금융위기는 이 계획을 백지화시켰다. 주민들의 반대로 택지지구 예정 지구에서 해제되었다. 시인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 것이다. 생태시인 이문재를 낳은 김포 검단의 이번 사례는 개발만능주의가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것으로 내게 비쳐졌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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