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후배의 함양 덕유산 자락 외딴집입니다. 우리의 첫 만남이 80년대 중반이었으니, 벌써 30여년이 다되었습니다. 젊음의 소비마저 낭만적 객기에 저당잡힌 저는 캠퍼스를 뒤로 하고 강원 산골 탄광촌을 기웃거립니다. 후배는 대한석탄공사가 있는 도계가 고향입니다. 엉뚱한 저의 이탈이 그와의 30년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80년대의 마지막 겨울, 한 학기를 남겨놓고 우리는 프롤레타리아로 현장에 들어갔습니다. 3년이 지난 겨울 우리는 의왕시 포일동 서울구치소의 면회실에서 재회합니다. 그가 국보법으로 구속된 것입니다. 그는 출소 후 막일로 돈을 모아 어렵게 외딴집을 장만 했습니다. 그는 한살림 회원으로 오미자 유기농 농사로 새 삶을 꾸렸습니다. 이곳에 터를 잡은 지 20년이 다 되었습니다. 저의 발걸음은 2 ~ 3년에 한번 꼴로 덕유산으로 향했습니다.
2012년 4월 12일. 총선 다음날. 저는 7년 만에 함양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미리 후배 집으로 잘 삭혀진 홍어를 택배로 주문했습니다. 함양터미널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고물 포터로 산골 집에 다다르니 밤이 이슥했습니다. 못 말리는 저의 술병이 도졌습니다. 2박3일 동안 밤낮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술독에 빠졌습니다. 3일째 되는 날 아침, 그가 정색을 하고 나를 탓했습니다.
“나도 형처럼 괴로워.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저의 기억은 촌충마디처럼 토막졌습니다. 필름이 끊어진 내가 도대체 그에게 무슨 넋두리를 퍼부었는지 도통 기억이 없습니다.
“형, 이대로 올라갔으면 좋겠어요. 내가 너무 힘들어요.”
터미널에서 속을 풀고 올라가라는 그의 말도 뿌리치고 저는 택시를 잡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옹졸한 처신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강화 외포항에 도착하니, 밤이 깊었습니다. 모텔에 여장을 풉니다. 안개로 아침배가 결항되어 초췌한 몰골로 저는 오후에 섬에 들어왔습니다. 제 배낭에는 그에게서 건네받은 편지 4통이 들어 있었습니다. 구속된 그에게 제가 보낸 편지입니다. 그가 구치소에서 제게 보낸 봉함엽서는 분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금주에 들어갔습니다. 알콜의존증이 역력한 저를 다그치기 위해 속깊은 그가 극약처방을 내린 지 오늘로 정확히 1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의지가 약한 제가 미덥지 못합니다. 다시 1년 저의 의지를 다지겠습니다. 그날이 오면 2년전 제 손에 되돌아 온 편지를 읽고 함양 덕유산자락 외딴집 그를 찾아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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