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지은이 : 이성복
펴낸곳 : 문학동네
나는 언저리를 사랑한다 / 언저리에는 피멍이 맺혀있다
속표지를 넘기자마자 나타나는 글귀다. 시집으로 치면 自序에 해당된다. 피멍 맺힌 언저리에 서야만 삶과 죽음, 고통과 상처와 허무, 사랑과 이별을 잘 들여다볼 수 있다는 말일까. 이 책은 시인의 아포리즘 산문집이다. 잘 알다시피 아포리즘이란 금언(金言), 격언(格言), 경구(警句), 잠언(箴言) 따위를 이른다. 책에 실린 글은 모두 541개다. 한쪽에 두 개의 짧은 글귀가 실렸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글이 길어졌다. 대부분이 한 줄의 짧은 글인데 한 면을 차지하는 긴 글 서너 개가 눈에 뜨였다. ‘국내 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라는 시인의 시집을 나는 얼마 전에 초창기 시집 두 권을 잡았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와 ‘남해 금산’이다. 올 벽두에 시인이 10여년 만에 일곱 번째 시집을 펴냈다. 이두문자로 쓰인 신라 향가의 한 구절을 제목으로 삼았다.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는 ‘오다, 서럽더라’라는 뜻이란다. 하지만 나는 결국 시인의 오래된 산문집을 손에 넣었다.
이 책에 실린 짧은 글들은 90년 처음 세상의 빛을 보았다. 십여 년이 지나 문학동네에서 재출간했다. 나의 80년대는 이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미학은 무슨 얼어 죽을 미학이란 말인가. 민중들이 고통에서 죽어 나가고 있는데. 그때 나는 공장노동자로서 현장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런 폭압적인 시대의 아픔에서 시인은 한걸음 비켜나 은유로 나아갔는데, 오히려 시인은 문학적 생명을 얻어 오래갔다.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 시절 대부분의 시인들은 질곡에 빠진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민중·혁명·계급 등. 직설적 구호에 빠진 것도 사실이었다. 90년대는 혼돈의 시대였다. 80년대 혁명의 시대를 회고하는 문학을 ‘후일담 문학’으로 폄하했다. 시인은 이렇게 얘기했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과, 고통에 대한 아포리즘을 시화(詩化)시키는 일(221쪽)’의 두 가지 가능성에서 어떻든 삶의 손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여태껏 우리 시대만큼 물질이 정신에게 치명타를 준 적은 없다. 물질과 정신을 서로 싸우게 만든 책임까지 우리 시대에 돌아올지 모른다. 물질의 근본 속성은 평등이다. 우리는 서로 동등해지려 하면서 물질화된다.(8쪽)
신은 우리와 같은 공단(工團)에서 일하는데, 언제나 야근을 도맡아 한다. 그에게는 애인도, 누이도, 고향도 없다.(17쪽)
시작(詩作) - 지금, 이 자리에서 하찮은 것들의 정체를 밝혀, 그들의 성스러움을 되찾아주는 것.(61쪽)
의식은 제가 아는 것만을 안다. 머리로 씌어진 글들의 재미없음.(2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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