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대빈창 2013. 9. 25. 07:29

 

 

책이름 :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지은이 : 고정희

펴낸곳 : 창작과비평사

 

이 시집은 시인의 1주기에 맞추어 나온 유고시집이다. 1부 ‘밥과 자본주의’ 연작시 26편, 2부 ‘외경읽기’ 연작시 16시편, 3부 마당극시 ‘몸통일 마음통일 밥통일이로다’ 그리고 4부의 시 두 편‘ 사십대’와 ‘독신자’로 모두 45편이다. 실린 시들이 대부분 길어 시집은 책술이 두텁다. 시집에는 시인 생전의 모습과 영결식 사진 13장과 여성운동 동지 조옥라 교수의 발문과 시인 연보와 이시영 시인의 편집후기가 실렸다.

 

(······)

 

크고 넓은 세상에 / 객사인지 횡사인지 모를 한 독신자의 시신이 / 기나긴 사연의 흰 시트에 덮이고 / 내가 잠시도 잊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달려와 / 지상의 작별을 노래하는 모습 보인다

 

(······)

 

뒤늦게 달려온 어머니가 / 내 시신에 염하시며 우신다 / 내 시신에 수의를 입히시며 우신다 / 저 칼날 같은 세상을 걸어오면서 / 몸이 상하지 않았구나, 다행이구나 / 내 두 눈을 감기신다

 

이 시집의 마지막 시편인 ‘독신자(188 ~ 190쪽)’의 2연과 8연이다. 시인이 떠난 지 벌써 23년이 되었다. 시인은 지리산 뱀사골 급류에 휩쓸려 아깝게 생을 마감했다. 44살이었다. 나는 그때 한 여류시인의 안타까운 죽음이 실린 신문기사를 이상하게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왜 그 기억이 뇌리 한 구석에 살아남았을까.  시인은 안산에서 살았다. 그 시절 나는 안산공단의 노동자였다. 91년 안산은 허허벌판에 공단만 입주했고, 주거지 및 편의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신생 도시였다. 지루한 노동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탈출하고픈 욕망이 지리산 계곡을 꿈꾸게 만들었을까. 2부 외경읽기의 ‘다시 오월에 부르는 노래’가 91년의 여름으로 나를 끌고 갔다. 4월 26일. 명지대 강경대 군이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타살되었다. 전남대 박승희, 경원대 천세용, 전민련 김기설은 분신하고 투신했다. 성균관대 김귀정이 강경집압으로 또 죽었다. 나는 그때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의 의문사 주검을 안양병원에서 지키고 있었다.

나의 아둔함은 20년이 흘러서야 시인이 사라진 거대한 여백을 간신히 응시했다. 시인에게 시는 민족·민중·여성 해방을 위한 무기였다. ‘대중적 무기로서의 시’로 ‘세상 변혁의 열정’을 노래한 시인 전사 김남주의 표사가 눈을 찔렀다. ‘고정희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는 동갑내기 친구였다. 아버지 기일 때나 명절 때에 고향에 가면 그의 무덤을 어김없이 보게 되는데······’ 그렇다. 전남 해남 땅끝 마을. 80년대 혁명의 시대 큰 등불이었던 두 시인의 생가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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