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화첩기행 3 / 김병종의 모노레터
지은이 : 김병종
펴낸곳 : 효형출판
화첩기행 1과 2는 각각 '예의 길을 가다'와 '달이 뜬다, 북을 울려라'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고향을 어찌 잊으리'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화첩기행 3은 천재 예술가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기행문의 해외편이다. 내용은 14명의 예술가들과 그들의 예술혼의 주무대였던 세계의 도시들이 짝을 맞추었다. 문인으로 전혜린, 이미륵, 아나톨리 김, 윤동주, 김우진이 있고, 음악인으로 윤이상과 루드밀라 남 그리고 빅토르 최, 최건, 윤심덕이 등장한다. 영화인 김염과 무용의 최승희, 미술가로 이응로와 도예가 이삼평, 유일하게 한민족이 아니지만 누구보다 더 뜨겁게 조선을 사랑해 조선의 혼이 되고자 망우리에 묻힌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가 있다.
갈피를 넘기면서 우울함과 답답함에 명치로 찌르르한 통증이 몰려온다. 마지막 책장을 덮자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민다. 그것은 '왜 우리에게는 아리타가 없고, 경덕전이 없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있으되 전통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리라'는 저자의 울분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세계 10위 무역대국이라는 자화자찬에는 애절한 천재 예술가들의 흔적을 무참하게 짓뭉갠 민족간의 이데올로기 대립과 한강의 기적이라는 개발독재 역사가 숨어있다.
현실의 뒤꽁무니를 쫒기에 바쁜 우리는 그들의 애닯고 서러운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조차 없는 지 모르겠다. 문청시절 신춘문예 소설당선을 수상한 필력과 더불어 천진하다 못해 어리숙하게 느껴지는 화가의 삽화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 책은 힘없는 조국으로 인해 먼 이역만리에서 조국에 대한 뜨거운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스러져간 예술가들의 서글픈 발자취를 희미하게 보여준다.
3권을 책씻이하고 나니, 1999년부터 출간된 화첩기행 시리즈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가 짐작했는데, 뜬금없이 4권이 출간됐다. '김병종의 모노레터'의 부제가 '화첩기행 네번째'인 것이다. 기존의 화첩기행 시리즈와 모노레터는 한평생 열정 속에 삶을 녹여 낸 예인(藝人)들과 그들의 열정이 살아있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하지만 글의 형식에 있어 전자는 기행문 형식이고, 후자는 편지글이라는 것이 다른 점이다. 화첩기행 1과 2는 먹고 사는데 온통 매달렸던 삶의 핍박으로 대중들의 뇌리에서 이름없이 스러져간 예인들을 살려냈다면 화첩기행 3은 힘없는 조국으로 인해 또는 독재정권의 강압에 못이겨 해외에서 예술혼을 불태울 수밖에 없었던 예인들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꾸며졌다. 반면 모노레터는 한평생을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삶을 마감한 예인들에 대한 찬사를 편지글에 담아냈다.
하얀 백지에 손으로 쓴 편지글을 나는 언제 띄우고 받았는가. 15년 전 먼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리라. 정신 못차리게 돌고도는 세상사에 다만 편리함이라는 미명으로 모니터를 보며 자판을 두드리지 않았는가. 사람과의 따스한 온정을 미련없이 팽개치고, 다만 뒤처지지 않으리라는 자기최면에 속절없이 '속도의 시대'에 자신을 위탁한 것은 아닐까. 이런 면에서 편리함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살가운 인정을 멀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용 수단으로 전락한 사람과 사람살이의 관계. 그렇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가 강요하는 인간관계의 물신화인 것이다. 31군데의 수신인 란의 예술가와 예술적 공간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대략 훑어보니 반수에 불과하다. 화가 김병종의 예술혼에 대한 편지를 받고, 나는 어떤 답장을 머릿속에 그렸는가. 혼신의 힘으로 예술적 열정을 쏟아부은 예인의 삶은 격정적인 감동과 함께 가련한 운명에 마음 한 구석이 안타까움으로 서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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