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날랜 사랑

대빈창 2013. 12. 6. 08:11

 

 

책이름 : 날랜 사랑

지은이 : 고재종

펴낸곳 : 창비

 

얼음 풀린 냇가 /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 은피라미떼 보아라 / 산란기 맞아 / 얼마나 좋으면 / 혼인색으로 몸담장까지 하고서 / 좀더 맑고 푸른 상류로 / 발딱 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에 봄햇살 튀는구나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 세울 /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

 

표제작 ‘날랜 사랑(11쪽)’의 전문이다. 깨끗한 물에 알을 낳으려는 본능으로 세찬 여울을 타고 넘는 피라미 떼를 그린 절창이다. 쏟아지는 봄 햇살 속에서 튀어 오르는 피라미의 생명력은 얼마나 눈이 부신가.

 

참새, 피죽새, 장끼, 까치, 은피라미, 조선소, 엉머구리, 고양이, 뱁세, 토끼, 개, 까투리, 붉은머리오목눈이, 청딱따구리, 청설모, 꽃사슴, 개구리, 쥐, 통돼지, 흰 고니, 강아지, 종달새, 소쩍새, 들비둘기, 비비새, 머슴새, 뻐꾹새, 다슬기, 송사리, 산노루, 청벌레, 응애, 진딧물, 황소, 쑥국새, 풀여치, 동박새, 멧새, 불개미.

 

시편마다 고개를 내밀고 있는 짐승과 곤충과 새들이다. 시인의 네 번째 시집으로 초판이 1995년에 나왔다. 시편마다 무너져가는 농촌공동체의 자화상이 절절하다. 시집은 4부에 나뉘어 63편이 실렸다. 시인은 전남 담양 수북 궁산리에 살았다. 나는 '궁산'에서 궁벽한 산골이 연상되었다. 시인은 나고 자란 터전을 떠나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갈수록 핍진해져가는 농촌 현실을 노래했다. 유일 청춘 ‘정수곤’은 오줌 놓고 뭐 볼 새도 없이 마을 농사일에 불려 다니고, ‘월곡댁’은 애비 제사에 얼굴도 내밀지 않는 아들 사형제에 낙심하고, 산아이 ‘순동이’는 운신도 못하는 아비와 산골 외딴집에 살며 외로움에 바람나 도망 간 어미를 찾고, 상머슴 ‘정석씨’는 부지런을 밑천으로 수렁논과 하늘받이를 건답배미와 최상등답으로 바꾸었다.

시인 곽재구는 발문 ‘결코 쓰러지지 않을 궁산리의 이야기’의 끝머리를 이렇게 마감했다. ‘연두빛 새싹이 돋아서 새로운 희망과 기대에 찬 궁산리들이 도처에 일어서는 사무친 그리움의 날들이 빨리 왔으면 싶다.(145쪽)’ 그로부터 20여년이 되었다. 시인은 고향과 농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시골마을 초입마다 서있는 느티나무와 정자가 시인은 서러웠다. ‘삼복염천에 정자나무 그늘아래 앉을 수 있다는 것 축복이지만, 뒷녘으로 병풍을 치는 청산과 구름, 사람 없는 데서 주인 노릇을 하는 청풍과 양광, 새소리와 꽃향기와 앞들의 생생한 물색을 홀로 느껴야 한다는 건 또 저주임에랴.’ 그렇게 시인의 고향은, 아니 우리들의 고향은 이 땅에서 서러운 뒷 그림자를 질질 끌며 아스라히 멀어져갔다. 가난하게 살다 흙에 묻혀야겠다. ' 맑은 날(15쪽)'이 눈에 밟혔다.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

그날 새벽에도 / 요강을 들고 나와 / 시린 푸성귀 밭에 / 자기의 마지막 / 따스운 오줌 한방울까지 / 철철 부어주고 / 그는 갔다

그날따라 하늘은 / 티 한점 없이 쟁명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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