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죽음의 수용소에서
지은이 : 빅터 프랭클
옮긴이 : 이시형
펴낸곳 : 청아출판사
이 책을 손에 넣는 과정을 불량하게 표현하면 '쌔볏다'가 된다. 책은 주민자치센터의 대여용 책들에 끼어 있었다. 핏빛 표지 때문이었다. 책등에 일련번호가 없다. 알지 못할 누군가 빌려간 책을 반납하면서 휩쓸려 왔을 것이다. 표제가 눈에 익었다. 그렇다. 법정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 50권 중의 한 권이었다. 나는 책을 잡으며 자신을 합리화시켰다. 주인이 누군지도 모를, 출간된 지 10년이 다된 손때 묻은 책은 나를 위해 지금 이 곳에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책 욕심이 유다른 나의 책장에 이 책은 없지 않은가.
저자 빅터 프랭클은 유대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물여덟명 중에 한 명 꼴로 살아남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3년을 보냈다. 이 책은 매일 생사의 엇갈림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인간 존엄성을 보여 준 저자의 자서전적 체험 수기다. 빅터 프랭클은 정신요법 제3학파라 불리는 로코테라피 학파를 창시했다. 로코테라피는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 주는 것을 그 과제로 알고 있다.’(173쪽)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처형 직전에 집행유예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갖는 것을 정신의학에서 ‘집행유예 망상’delusion of reprieve'이라 한다. 절망적인 현실을 망상으로 피하려는 것이다. 나는 젊은 시절, 몸을 막 굴려 병원 신세를 오래졌다. 30대 초반. 정오를 조금 지난 한 여름 아스팔트는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무슨 일로 8차선 대로를 무단횡단하다 달려오던 택시에 치었다. 튕긴 충격으로 아스팔트에 뒹굴면서 처음 든 생각은 “제발, 아무데도 안 다쳤으면”하는 기대였다. 어쩐 일인지 두발로 올곧게 섰지만 느낌이 이상했다. 시선을 내리 깔자 종아리를 뚫고 나온 날카로운 뼈가 보이고, 가공할 통증이 몰려왔다. 그때서야 공포와 함께 무지막지한 고통이 전신을 감쌌다.
‘강제수용소에서 사람들은 가면을 벗고, 돼지와 성자의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242쪽) 죽음의 공포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돼지로 전락했고, 소수만이 성자의 길을 택했다. 가장 극악한 돼지는 카포capo였다. 나치의 주구로 전락한 유대인들로 감시병이나 나치대원보다 더 악랄하고 가혹하게 같은 유대인을 괴롭혔다.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려 민족을 배반한, 일제 강점기 일본 경찰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한국인 순사와 같은 족속들이었다.
이 땅은 아직 악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독립군을 잔인하게 고문하던 노덕술은 해방정국에서 종로경찰서장이 되어 반민특위를 오히려 탄압하고 구속했다. 청산되지 못한 불행한 역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옥죄고 있다. 친일 순사의 후예 이근안은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였다. 이 땅에서 가난하고 못배우고 힘없는 자에게 강제수용소는 현재진행형이다. 쌍용자동차 노동자 과잉진압에서,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에서, 제주 강정 구럼비 폭파에서,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크레인에서, 밀양 할배 할매들의 송전탑 건설 반대투쟁에서, 삼성 반도체 여공들의 백혈병 산재에서, 화염에 휩싸인 용산 참사에서, 토건족의 호주머니를 부풀리려 금수강산을 작살 낸 새만금과 4대강에서······.
p. s 그리고 국민의 안전에 있어, 무능과 무책임으로 초지일관한 세월호 참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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