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위대한 식사

대빈창 2014. 9. 22. 05:48

 

책이름 : 위대한 식사

지은이 : 이재무

펴낸곳 : 세계사

 

산그늘 두꺼워지고 흙 묻은 연장들 / 허청에 함부로 널브러지고 / 마당가 매캐한 모깃불 피어오르는 / 다 늦은 저녁 멍석 위 둥근 밥상 / 식구들 말없는, 분주한 수저질 / 뜨거운 우렁된장 속으로 겁없이 / 뛰어드는 밤새 울음. / 물김치 속으로 비계처럼 둥둥 / 별 몇 점 떠 있고 냉수 사발 속으로 / 아, 새까맣게 몰려오는 풀벌레 울음 / 베어문 풋고추의 독한, / 까닭 모를 설움으로 / 능선처럼 불룩해진 배 / 트림 몇 번으로 꺼트리며 사립 나서면 / 태지봉 옆구리를 헉헉, / 숨이 가쁜 듯 비틀대는 / 농주에 취한 달의 거침 숨소리 / 아, 그날의 위대했던 반찬들이여(위대한 식사 / 전문, 32쪽)

 

유통 기간 없는, 잘게 썬 햄 조각, / 한 계절 쓸쓸히 냉동실에서 보낸 여수산 멸치, / 짓이겨진 마늘, 텃밭 떠나온 지 오래인 쭈글쭈글한 고추, / 표백 처리된, 뻔뻔하게 싱싱한 콩나물 넣고, 고추장 풀고, / 마지막으로 발효 잘된 김치 넣어 끓인다 이제 곧, / 태생이 다른 저것들은 그러나 펄펄 끓는 냄비 안에서 / 서로의 살(肉) 속으로 스며 깊은 맛 우려내리라 / 찌개가 끓는 동안 창 밖 한층 두꺼워진 하늘 / 바라다본다 찌개처럼 얼큰한 세상이 생의 온전한 꿈이었던, / 마늘이었고, 고추였고, 멸치였던, 내 마디 짧은 삶 아프게 / 다녀간 개성의 얼굴들 떠올려본다 / 다 익은 찌개 앉은뱅이식탁에 내려놓고 식은밥 한 덩이 / 썩썩 비벼 마른 입 얼얼하도록 떠넣는다 / 텅 빈 거실, 울리지 않는 전화기 마주한 채 / 홀로 하는 눈물나는 오후의 때늦은 식사(오후의 식사/ 전문, 105 ~ 106쪽)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은 4부에 나뉘어 79편이 실렸다. 그중 나의 눈길이 오래 머물렀던 시 두 편의 전문이다. 일을 마친 늦은 저녁 가족의 식사는 멍석위의 둥근 밥상으로 찬은 우렁된장과 물김치와 풋고추가 전부다. 하지만 별 몇 점과 밤새와 풀벌레 울음이 함께 했다. 때를 놓친 오후의 홀로 식사는 햄 몇 쪽과 표백 처리된 콩나물, 오래 묵은 멸치와 찧은 마늘, 고추, 김치를 함께 넣어 끓인 찌개가 전부다. 두 시는 농촌의 자연과 도시의 인공 밥상을 마주한 가족과 개인을 그렸다. ‘매향리가 미군에 폭격을 당해도, 북한 어린이가 굶어 죽어도, 동남아시아 나이어린 노동자가 산재를 당해도, 그들 개인의 불운으로 여기는’(사라진 분노를 향하여, 117 ~ 118쪽) 농촌 공동체에서 강제로 떨려나가 늦은 오후 홀로 눈물 나는 식사를 하는 도시 변두리의 원자화된 개인은 ‘폭죽처럼 터지는 화려한 이벤트성 스캔들’(밤의 산책, 126쪽)에 정신이 팔렸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숭원은 ‘도시의 어둠에 깃들이는 부활의 꿈’에서 이 시집을 시인이 ‘구체적이고 전형적인 현실문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생태에 대한 관심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시인은 그동안 자본과 문명으로부터 소외된 채 몰락으로 치닫는 농촌의 살풍경을 절절하게 노래했다. 자연파괴와 생태계 복원을 말하는 이 시집의 표사에 시인 김지하는 생명!, 신생(新生)!을 ‘살아 있고 살려주어 고맙고 눈물난다.’고 감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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