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작은 침묵들을 위하여
지은이 : 유승도
펴낸곳 : 창비
내가 인간세계에서 승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듯이 / 새의 세계에서 새들이 너를 부르는 이름을 알고 싶다 / 새들이 너를 부르듯 나도 너만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오래도록 마음의 문을 닫고 세상을 멀리하며 나는 살아왔다 / 아침이야 아침이야 네가 햇살보다 먼저 찾아와 창문 앞에서 나를 불러 아침을 안겨주었듯 저기 저 산, 네가 사는 숲에 들어가 나도 너의 둥지 옆에서 너의 이름을 불러, 막 잠에서 깬 너의 눈이 나를 보는 것을 보고 싶다 / 그때 너는 놀라며 나의 이름을 부르겠지 ······ 승도야
‘나의 새’(1쪽)의 전문이다. 이 시였다. 내가 시집을 참을성 있게 기다린 이유가. 함민복의 「절하고 싶다」에서 시를 처음 접했다. 하지만 시인의 첫시집은 품절이었다. 나는 하는 수없이 산문집「고향은 있다」와 시집 「차가운 웃음」을 먼저 손에 들었다. 시간은 흘렀고, 기다림은 3쇄를 찍은 따끈따끈한 시집으로 보상받았다. 시집은 4부에 나뉘어 75 시편이 실렸고, 해설은 반갑게 시인 김명인의 ‘애기똥풀꽃의 웃음’이었다. 스승이 제자의 첫 시집 발간을 축하하며 시집의 마무리를 맡았다.
시인이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예일리의 만경대산 중턱인 해발 600m의 산골에서 아내와 아들과 함께 자급자족 생활을 한 지 15년이 되었다. 산속에서 시인은 토종벌을 치고, 포도·감자·두릅 따위 농사를 짓는다. 세상과의 불화로 시인은 산골에서 농사를 짓게 되었다. 80년대 초반, 군홧발 정권의 무지막지한 폭력과 범죄자 누명을 뒤집어 쓴 군생활을 통해 가장 잔혹한 깡패가 국가권력이라는 것을 시인은 뼈저리게 깨우쳤다. 시인은 건설현장 막일꾼으로, 농가의 머슴으로, 연안어선 선원으로, 탄광의 채탄부로 떠돌다, 정선선의 종착역 정선 구절리 폐광촌 빈 사택으로 흘러들었다. 스스로 감옥에 갇힌 그에게 어느 날 문득 꿈결처럼 새소리가 들렸다. 시가 왔다.
찔레꽃 / 애기똥풀 / 두릅나물 / 다람쥐 / 철쭉꽃 / 피라미 / 꺽지 / 퉁가리 / 모래무지 / 매미 / 가재 / 갈대꽃 / 머루 / 산토끼 / 할미꽃 / 산쥐 / 까치 / 개미 굼벵이 / 꽃뱀 / 개구리 / 까마귀 / 소쩍새 / 미루나무 / 도라지꽃 / 상황버섯 / 산삼 / 냉이 / 민들레 / 옥수수 / 오이 / 고구마 / 달걀 / 토마토 / 채송화.
산골 농사꾼 시인의 첫 시집에 등장하는 제재다. 시편들을 읽어나가다 눈에 밟힌 구절들이다. 섬에 터를 잡은 지 9년이 다 되었다. 윗집·감나무집 형수 그리고 아랫집 할머니가 낯선 섬생활에 어리숙한 우리 모자에게 베푼 은혜로운 손길과 같았다.
누가 갖다 놓았을까 처마 밑 댓돌 위에 애호박 셋 / 어제 저녁, 찬은 뭘로 만들어 먹냐고 묻던 할머니가 있었는데(아침 햇살 中에서, 48쪽)
주저하며 일어서니 다리를 절룩이며 따라나와 방 밖의 외등을 켜신다 / 살펴서 잘 가시게(가을 中에서, 50쪽)
자신의 손보다 작게는 나누어주지 못하는 커다란 손 / 그런 손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아득히 잊고 살았었다(큰 손 中에서,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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