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따뜻한 적막
지은이 : 김명인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이시영 / 이하석 / 정호승 / 최승호 / 김재진 / 함민복 / 류기봉 / D. H 로렌스 / 게리 스나이더 / 나나오 사카키 / 하이쿠 선집. 내 손을 탔거나, 손길을 기다리며 책장에서 어깨를 겯고 있는 시선집들이다. 나의 무딘 감수성은 시를 가까이 한 지가 그리 멀지않다. 대부분 시인의 처녀시집을 잡았다.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시선집에 눈길이 갔다. 시선집을 즐겨 찾아야겠다. 첫 시집을 잡은 몇 분의 시선집이 출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시를 늦게 접하면서 압축(?)적 읽기의 편법인지도 모르겠다.
東豆川(1973 ~ 1979) / 머나먼 곳 스와니(1980 ~ 1988) / 물 건너는 사람(1989 ~ 1992) / 푸른 강아지와 놀다(1993 ~ 1994) / 바닷가의 장례(1995 ~ 1996) / 길의 침묵(1997 ~ 1999) / 바다의 아코디언(2000 ~ 2001) / 파문(2002 ~ 2005). 시선집의 차례가 아주 친절하다. 이중 「물 건너는 사람」만 세계사에서 펴냈고, 모두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차례만 보고 시인의 등단년도와 시집 출간년도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시선집은 시인이 펴낸 8권의 시집 가운데 151편의 대표시를 추렸다. 30년이 훌쩍 넘는 긴 세월의 시적편력이 한권의 선집에 담겼다. 해설은 문학평론가 홍정선의 ‘낡아서 편안해진, 삐거덕거리는 인생 앞에서’다. 반가운 이름이다. 나의 학창시절. 알코올에 쩐 흐릿한 눈빛으로 훑은 꼽을 수 있는 몇 권의 책들에 얼굴을 내민 이들은 번역 김석희, 소설 이인성, 시 황지우 그리고 평론은 홍정선이었다.
'되살아나는 무서움 살아나는 적막 사이로'(13쪽) ‘안개’의 한 구절이다. 고개를 갸웃했다. 표지 사진과 연결 지을 수 없다. 이미지는 모네의 인상파 그림처럼 구름이 빠르게 흩어지고 이쪽 능선은 어두운데 먼 하늘은 훤하다. 시선집의 마지막 두 번째 시가 표제시였다. 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직은 제 풍경을 거둘 때 아니라는 듯 / 들판에서 산 쪽을 보면 그쪽 기슭이 / 환한 저녁의 깊숙한 바깥이 되어 있다’(284쪽) 고개가 끄덕여졌다.
오래전 함민복 시인과의 술자리에서 시인을 알게 되었다. ‘외로움과 허기와 가난이 준 상처에 깊이 관련된’(295쪽) 시들을 읽으면서 나는 어쩔 수없이 시인 친구를 떠올렸다. 첫 시집 「東豆川」 뒷 표지에 인용된 ‘詩의 바탕이 眞正性으로 이해될수록 더욱 불가해한 고통의 뿌리에 나는 닿아 갔고’라는 구절은 나에게 ‘東豆川 4’의 1, 4연을 가리켰다.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그 아이 혼혈아인 / 엄마를 닮아 얼굴만 희었던 / 그 아이는 지금 대전 어디서 / 다방 레지를 하고 있는지 몰라 연애를 하고 / 퇴학을 맞아 고아원을 뛰쳐나가더니 / 지금도 기억할까 그때 교내 웅변대회에서 / 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마디 말 / 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 / 나는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
(······)
그래 너는 아메리카로 갔어야 했다 / 국어로는 아름다운 나라 미국 네 모습 주눅들 리 없는 合衆國이고 / 우리들은 제 상처에도 아플 줄 모르는 단일 민족 / 이 피 가름 억센 단군의 한 핏줄 바보같이 / 가시같이 어째서 너는 남아 우리들의 상처를 / 함부로 쑤시느냐 몸을 팔면서 / 침을 뱉느냐 더러운 그리움으로 / 배고픔 많다던 동두천 그런 둘레나 아직도 맴도느냐 / 혼혈아야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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