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하게 자랐겠는 걸.”
어머니가 큰 호박을 움켜잡는 손짓을 하셨습니다. 저녁산책이었습니다. 무려 5개월 만에 녀석을 다시 만났습니다. 4월 중순 대빈창 제방길이 바위벼랑에 막힌 외진 곳. 어머니는 녀석이 발붐발붐 집을 나왔다가 길을 잃어 돌아가지 못했다고 쯧쯧 혀를 차셨습니다. 대빈창 제방길을 가파른 산비탈이 바투 따라가다 바위벼랑이 한굽이 바다를 막아섭니다. 제방과 이어지는 산자락은 온통 아카시나무가 뒤덮었습니다. 아카시와 참나무, 칡과 머루, 키 작은 관목과 사람 키를 웃자란 들풀로 신록이 울창한 산속으로 녀석이 몸을 숨겼습니다. 안경을 쓴 것처럼 눈가에만 둥그렇게 검은 무늬가 박힌 흰 토끼는 덩치가 그대로였습니다. 얼마나 반가운지 녀석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토진아!”
하지만 녀석은 들은체만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안의 풀을 오물거리며 폴짝폴짝 뛰어다니기에 바빴습니다. 녀석은 분명 제방을 쌓다 남은 사석 돌무더기 틈에 잠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대빈창에 홀로 사시는 할머니가 다리가 불편해 풀 뜯기도 힘겨워 일부러 풀어 놓았다고 합니다. 다음날 아침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아침산책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토끼는 온데간데 보이지 않고 물이 나는 해변에 까마귀들이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쪼고 있었습니다. 제가 가까이 다가서자 펄쩍펄쩍 뛰다가 땅을 스치듯 날아 저만큼 내려앉습니다. 건강망을 묶은 말장에 앉아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갈매기들이 극성스럽게 울어댑니다. 녀석들은 그물 속의 물고기를 노리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물 빠지는 갯벌에서 연신 허리를 굽힙니다. 망둥어 이감(미끼)인 물엄소(민챙이)를 잡아 허리에 매단 패트병에 넣습니다. 할아버지는 나는 물을 따라 바다로 나가면서 낚시대를 드리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야 망둥이 씨알이 굵습니다. 물이 밀면서 새우를 쫒아 들어오는 망둥이 갯바위 낚시는 잔챙이만 걸리기 일쑤입니다.
그때 머리 위에서 까마귀 떼 특유의 음산스런 울음이 들려왔습니다. 고개를 쳐든 저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죽은 나무 가지에 걸터앉은 까마귀들의 부리에 작은 물고기가 물렸기 때문입니다. 까마귀들의 본격적인 영역확장 전쟁이 시작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놈들은 이제 바다를 넘보기 시작했습니다. 영악하다는 까치도 아직 개척하지 못한 바다입니다. 머릿속에 한 편의 조류 진화도가 그려졌습니다. 까치가 공중을 가로지르며 바다로 향하자 점차 하얀 무늬가 검은 색으로 바뀌며 까마귀로 변합니다. 물속 물고기를 노리는 까마귀가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가며 가마우지로 변합니다. 커다란 물고기를 부리에 문 가마우지가 가쁜 숨을 내쉬며 그물말장에 내려앉자 등털이 회색으로 뒤덮히면서 갈매기로 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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