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북학의
지은이 : 박제가
옮긴이 : 박정주
펴낸곳 : 서해문집
이 책을 잡게 된 데는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와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읽기 전까지 수원화성은 하나의 불가사의였다.’ 이 한 구절이면 충분했다. 김봉렬이 「한국건축 이야기 1 - 모방인가, 창조인가 수원화성」에서 한 말이다. 건축가에게 수원화성水源華城은 문화적 다양함이 약화된 조선 후기 건축계에서 어느 순간 불쑥 솟아난 돌연변이였다. 그는 수원화성이 잉카나 마야문명권의 건축물이었다면, 아틀란티스 대륙인들의 후예가 건설했다거나 아니면 외계인이 만들었다는 등 황당한 추론이 무성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돌연변이 건축물을 북학의와 열하일기를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북학의北學議 서문에서 연암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북경에서 돌아오자 초정楚亭이 자기가 지은 「북학의」 내·외 內外 두 편을 보여주었다. 초정은 나보다 먼저 북경에 다녀 온 사람이다.(······) 내가 이 책을 한번 살펴보았더니, 내가 지은 「일록日錄」과 조금도 어긋나지 않아 마치 한 솜씨에서 나온 것 같았다.”(20 ~ 21쪽) 여기서 일록日錄은 열하일기熱河日記를 가리킨다.
박제가(1750 ~ 1805)는 29세 때인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의 종사관 자격으로 이덕무와 함께 청나라에 갔다. 초정은 청나라에 다녀온 직후 ‘북학의’를 저술했고, 책의 서문을 1778년(정조2년) 9월 통진通津의 시골집에서 썼다. 굳이 이 사실을 덧붙이는 것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통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북학의 내·외편을 좀 더 현실화시키기 위해 1799년(정조23년)에 상소문을 올린 것이 <진북학의>다. 초정은 수레, 기와, 벽돌, 수차, 화폐, 종이, 의복 등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조선의 문물과 비교, 분석했다. 그리고 가난한 조선, 비문명국 조선의 갈 길은 북벌이 아닌 북학이라고 역설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는 개혁사상가였다. 하지만 자칭 진보주의자인 나는 여기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나라는 지역적으로 중국과 가깝고 성음聲音도 비슷하다. 따라서 백성 전체가 본국의 말을 버린다해서 안 될 이유가 없다.”(111쪽) 초정의 시대적 한계인가. 대표적 중상학파로 급진주의자인 초정은 우리나라 땅이 너무 좁고, 현실이 너무 답답했는지도 모른다. 조선이 빠르게 문명국이 되려면 언문이 일치하는 중국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거리낌없이 나아갔다. 현대판 영어공용론자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초정의 시詩 한 편을 소개한다.(239쪽)
땅을 파서 황금을 얻는다 해도 / 만 근의 금만으로는 굶어 죽게 되네 / 바다에 들어가 구슬을 캐내도 / 구슬 백 섬을 개똥과 바꿀 건가? / 개똥은 땅의 거름이라도 되련만 / 그 구슬 무엇에 쓰리 / 육지 물건 연경과 통하지 못하고 / 바다 상인 왜倭나라에 가지 못하네 / 마치 들 가운데 있는 우물 같아서 / 퍼내지 않으면 저절로 말라 버리네 / 백성 편안하게 하는 것은 보물에 있지 않으니 / 삶이 나날이 옹색해질까 걱정되네 / 검소가 지나치면 백성이 즐길 수 없고 / 살림살이 지나치면 도둑만 늘어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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