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반성

대빈창 2015. 4. 27. 06:35

 

 

책이름 : 반성

지은이 : 김영승

펴낸곳 : 민음사

 

술에 취하여 /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 술이 깨니까 /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 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 /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시집의 세 번째 시 ‘반성 16’(21쪽)의 전문이다. 이 시를 어느 매체에서 접하고 시집을 물색했다. 품절된 시집을 온라인 중고샵을 통해 어렵게 손에 넣었다. ‘민음의 시’ 시리즈 6권 째였다. 시리즈 1은 고은의 「전원시편」이었다. 58년생 시인의 첫 데뷔시집이었다. 시집에는 모두 83시편이 실렸다. 첫 시 ‘반성·序’는 몇 쪽에 걸친 제법 긴 시로 현실을 조감하는 시적화법이 추상적, 관념적인 철학 용어가 곧잘 등장했다. 시인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이후 82편의 시는 일상적 체험을 구체적으로 평이하게 서술했다. 시편들의 제목은 난수표같이 어지럽게 번호가 붙었다. 시집 한 권이 모두 ‘반성’ 연작시였다. 하긴 시인은 연작시를 많이 발표한 것으로 유명했다. ‘반성’은 1300여 편, ‘권태’는 2000여 편, ‘희망’은 2000여 편을 썼다. 

대한민국의 술 문화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국 남자의 에너지원은 쌀밥에 이어 소주가 2위다. 소주에서 얻는 하루 섭취 칼로리가 128.7㎉로 매일 소주 두 잔을 마시는 셈이다. 한 해 사건사고 15만 건 중 술로 인한 사건이 3만 건으로 1/5이나 된다. 한국 성인남자 중 술로 인한 뇌질환 환자는 전체 인구의 6.8%로 221만 명이나 되었다. 시집의 1판1쇄는 1987년 3월 30일에 나왔다. 시편들은 온전히 군홧발 독재정권 전두환 시대에 쓰였다. 「반성」은 1980년대 풍요의 시대에 역설적으로 모든 경제적, 이념적, 도덕적 풍요로부터 소외당한 백수의 작업이었다. 문학평론가 이남호는 해설 ‘자조적 실존의 비극적 아름다움’에서 ‘시인이 삶에 대해 눈물 흘리는 일이나 술을 마시는 일은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했다. 시인은 술을 마심으로써 설명불가능한 현실을 유보시켰다. 시인의 삶과 시에 많은 술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술’이라는 한 음절의 단어가 등장하거나, 술 이름이 등장하는 시가 모두 27편이었다. 

‘술’ 얘기가 나온 김에 내가 저지른 황당한 ‘술’ 에피소드 3가지를 밝혀야겠다. 내 인생에서 회한에 젖은 시기는 고교졸업 후 백수로 보낸 두 해와 어렵게 들어간 대학을 낭만적 객기로 휴학하고 탄광을 찾았던 20대 초반이었다. 가난으로 진학을 좌절당한 나는 울분을 알코올에 기댄 주먹질로 소일했다는 고백을 몇 번 밝혔다.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김포 들녘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의 집. 몹시 취해 문간방을 쓰던 나는 저녁을 몇 숟갈 뜨지도 못하고 안방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들이부었던 낮술에 잠을 자면서 점점 취했을 것이다. 부풀어 오른 방광을 어쩌지 못하고 나는 급히 손에 집히는 문짝을 젖히고 바지 앞 춤을 열었다. 그때 잔등에 불이 번쩍 일면서 아버지의 호통이 귀청을 찢었다. 그 시절, TV는 미닫이 문짝이 달린 삼성 이코노였다. 

제천 의림지 주변 산골에서 고교 동창과 노가다를 뛰었다. 가난했던 우리는 그때 무슨 일로 안양에서 만나 낮술을 했다. 선술집에서 들이킨 막걸리와 안주 계란프라이가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때는 삼복더위였다. 시내버스 뒷좌석 창가에 앉았던 나는 역류하는 토사물을 어쩌지 못하고 열려진 창문으로 고개를 급히 내밀었다. 시큼한 콧물을 손으로 훔치자 찔끔 눈물이 흘렀다. 그때 새 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버스를 타려고 급하게 뛰어오던 단발머리 여학생이 염천에 쏟아진 날벼락을 맞았다.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나는 허공에 누워있는 느낌이었다. 균열을 일으키는 뇌세포로 머릿속은 아우성이었다. 끊긴 촌충마디처럼 어제 술자리가 떠올랐다. 냇가 다리근처의 포장마차가 마지막 술자리였다. 가을비가 처량하게 내리는 새벽녘이었다. 눈앞으로 상가 2층 창문이 마주 보였다. 내가 도대체 어디서 잠이 든 것인가. 이럴 수가! 다리위에 주차한 덤프트럭 운전석에 길게 누워 자고 있었다. 도대체 나는 취중에 이 높은 곳까지 어떻게 올라왔을까. 저절로 손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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