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많이 길어졌습니다. 한 줄기의 비행운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두텁게 퍼져 나가고, 바로 위에 날카롭고 가는 새 비행운이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해는 바다로 떨어지고 벌겋게 하늘을 수놓은 북새가 가라앉았습니다. 어두워지는 대빈창 해변 하늘로 쏜살같은 비행운이 푸른 하늘에 일직선의 흰 줄기를 남겼습니다. 오늘따라 디카나 휴대폰이 손에 없습니다. 봉구산자락을 거슬러 오르는 옛길을 버리고 급한 마음에 다랑구지 들녘을 가로지르는 농로 고갯길을 헐레벌떡 뛰었습니다. 어머니께 건네받은 디카를, 짙어가는 어둠에 조바심을 내며 대빈창 해변 하늘을 향해 연신 셔터를 눌렀습니다. 대기 속으로 퍼지며 엷어지고 두터워진 두 줄기의 비행운이 한 몸이 되었습니다.
김애란의 세 번째 소설집 「비행운」이 떠올랐습니다. 특이하게 수록된 8편의 작품 가운데 표제작이 없습니다. 소설집은 새로운 삶을 동경하는 형식으로 비행운(飛行雲). 하지만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연쇄적 불운 비행운(非幸運)에 발목 잡힌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담았다고 합니다. 작가 김애란이 떠오른 것은 매년 연례행사로 잡던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손을 떼었기 때문입니다. 4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작품집을 1회부터 소장하고 있던 나는 몇 년 전 소설집과 결별했습니다. 결별 이후 문학상 수상자 가운데 한 명이 김애란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억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김포 들녘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까까머리 꼬맹이들은 벼베기가 끝나 그루터기만 남은 들판을 내달렸습니다. 녀석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빳빳이 하늘을 향해 치켜든 채 달음박질을 했습니다. 논두렁에 걸려 넘어져도 이상한 달리기는 계속 되었습니다. 하늘에는 두 개의 비행운이 빠른 속도로 북녘하늘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야 B29는 빨라. 역시 쌕쌕이다.”
꼬마들에게 달리기 시합을 시킨 비행운의 주인공은 무조건 B29나 쌕쌕이였습니다. 여기서 ‘쌕쌕이’는 미 공군이 제트기 조종과 제트기의 계기, 형태 및 야간비행술을 교육시키도록 고안한 쌍발엔진의 기초훈련기 T-37기입니다. B29는 ‘하늘의 요새’로 한국전쟁 때 위용을 떨쳤던 폭격기입니다. 1945년 3월10일 새벽. 미국의 일본 패퇴작전의 서막인 도쿄대공습. 폭격기 340여대가 2400t이 넘는 소이탄을 일본 도쿄에 떨어뜨린 폭격기가 B29였습니다. 6시간 가까이 도쿄 상공에 100만발이 넘는 네이팜탄을 떨어뜨려 8만4000명이 목숨을 잃었고 100만명이 이재민이 됐습니다. 이후 미국은 민간인들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격한 도쿄대공세의 ‘전략적 교훈’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걸프전 등에서 그대로 되풀이 했습니다.
유사 이래 천인공노할 전쟁범죄 국가 미국이 민간인을 무차별 살상한 폭격기의 비행운을 보며 빈 들녘을 뛰어다니던 어린이들.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에서 태어나 자라고 어른이 되어 반세기가 지났지만 비행운은 한반도의 분단 철책을 오늘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달라진 것은 비행운을 따라 빈 들녘을 뛰어 놀 어린이의 웃음소리가 농촌에서 사라졌다는 서글픈 현실입니다.
p. s 대빈창 하늘의 비행운은 2. 13(금) 늦은 6시경 돌아오는 산책에서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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