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바다의 황금시대 파시

대빈창 2015. 3. 2. 05:27

 

 

책이름 : 바다의 황금시대 파시

지은이 : 강제윤

펴낸곳 : 한겨레출판

 

현관문을 밀치자, 고갯길 가드레일 안쪽 자투리땅에 허리를 굽혔던 어머니가 고개를 치켜드셨다. 어머니는 내일 봄비 소식을 듣고, 겨우내 가뭄에 시달렸던 보리밭에 요소를 주고 계셨다.

“서울, 이모한테서 전화 왔었어요.”

“참, 막내야, 민어 먹을 때 이모 젓가락도 놔줘라.”

설 연휴를 맞아 섬을 찾았던 작은 형과 누이 가족이 오후배로 섬을 떠났다. 점심을 먹으면서 인천에 사는 작은 형께 나는 물었다.

“형, 신포 시장에 민어 골목이 있어.”

“응. 많이 외졌지만 지금도 살아있어.”

내 머릿속은 올 여름철 복달임을 어머니를 모시고 형제들과 함께 하겠다는 계산이 서 있었다. 독서대에 얹힌 책은 ‘바다의 황금시대 파시’. 어머니는 회 얘기가 나오자 소녀 시절을 떠 올리셨다. 외할아버지는 서해 석모도의 선주셨다. 어머니는 어릴 적 민어회만 먹었다. 그 시절 그만큼 민어가 흔했다. 70년 전 어느 여름. 여동생을 데리고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데, 어린애만한 민어가 물살에 둥둥 떠내려 왔다.

어린 소녀였던 어머니는 큰 민어를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왔고, 온 집안의 칭찬을 들으며 할아버지가 떠 준 민어회를 맛있게 먹었다.

“민어는 파리가 몸에 붙으면 물속에 가라앉지 못하고 둥둥 떠다닌데.”

어머니의 말씀은 일리가 있었다. 민어는 부레가 크고 큰 놈일수록 얕은 물로 다녔다. 백성 민(民)을 쓰는 물고기는 쓸개를 빼고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기 전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예로부터 민어 어장으로 유명한 신안의 타리(태이도)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여든이 넘으신 어머니께 장거리 여행은 무리였다. 그때 책을 읽어 나가는 눈이 번쩍 떠졌다. ‘인천 신포 민어 골목’ 이었다. 민어는 산란기를 앞둔 6월말에서 9월까지가 가장 맛이 좋고, 크면 클수록 수컷일수록 육질이 좋아 맛있어 가격이 비싸다. 올 여름 소녀시절을 떠올리며 맛있게 민어회를 드시는 어머니와 이모의 모습을 볼 수 있겠다.

섬사람이 된 지 10년이 되었다. 그만큼 나의 생활은 바닷고기와 가까워졌다. 연평, 칠산 어장에서 조기떼가 사라진 원인은 인간의 무차별 남획에 조기가 생존법을 바뀌었기 때문이다. 얕은 바다 모래에서 산란하던 습성을 버리고 조기떼는 추자도 깊은 바다 속으로 숨어들었다. 어느 해 주문도 뻘그물에 조기 스무여 마리가 들었다. 아랫집 대머리 아저씨가 맛이나 보라고 건네 준 조기를 어머니는 소금 간을 해 옥상 그물망에 말려 아껴먹었다. ‘조도 섬등포 꽃게 파시’를 보며 나의 기억은 8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갔다. 하조도로 향하는 일행 중 섬이 고향인 친구가 있었다. 그는 첫 시집 「창꽃 향기 너에게 주리리」를 내고, 10년 전 너무 일찍 세상을 떴다. 친구는 수산고 출신이었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그는 수협 친구를 통해 일본 수출용 꽃게 포장상자를 어깨에 짊어지고 나타났다. 마취가 풀린 꽃게들이 톱밥 속에서 꿈틀거렸다. 세상에! 꽃게 등딱지 하나가 전기밥통 뚜껑만 했다. 작가 한창훈은 삼치를 ‘아홉 가지 중에 가장 먼저 손 가는 맛’이라고 삼치회를 추켜세웠다. 나는 주문도에 살면서 삼치회 맛은 모르고, 삼치구이를 맛나게 먹고 있다. 진말의 아시는 분이 뻘그물에 든 년 중 몇 마리 되지 않는 팔뚝만한 삼치를 넘겨주시면 어머니는 큼지막하게 토막을 내 소금간 해 꾸득꾸득 말려 자반으로 먹었다.

 

법성포·녹도 조기 파시 / 가거도·추자도 멸치 파시 / 덕적도·굴업도 민어 파시 / 재원도 민어·부서 파시 / 비금도 강달이 파시 / 어청도 고래 파시 / 거문도 삼치 파시 / 청산도 고등어 파시 / 조도 섬등포 꽃게 파시 / 울릉도·영덕 죽산항 오징어 파시

 

파시(波市)는 바다 위의 시장으로 성어기의 임시 촌락, 어업 전진기지였다. 파시는 바다에서 직접 생선을 사고파는 해상시장에서 어장 부근의 섬이나 포구에서 생선과 생필품 등을 사고파는 시장으로 확장되어 수천 척의 배와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주문도의 이웃 섬 아차도는 현재 27가구 44명이 사는 작은 섬이다. 하지만 일제 때 파시가 섰던 섬은 천 명 이상의 사람이 거주했고, 처마 밑으로 다녀 비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니 그 시절은 서도(西島) 군도(群島) 유인도 중 가장 작은 섬인 아차도에 면사무소가 있었다. 흥성했던 파시가 만들어 낸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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